법상스님─독립적인 자신의 업을 따라 살 뿐___

독립적인 자신의 업을 따라 살 뿐…

-법상스님-

빠따짜라는 남편과 두 아들, 부모님과 세 자매를 하루 아침에 모두 잃어버리고 거의 미친 사람처럼 소리쳐 울면서 거리를 헤매다 부처님의 처소에까지 이르렀다.

부처님께서는 그녀를 불러 다음과 같이 법문하셨다.

“남편과 아들이 끝까지 너를 보호해 줄 수는 없다.

자식도 친척도 부모도 어느 누구도 죽음이 닥쳐올 때 너를 보호해 줄 수는 없다.

설사 그들이 살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너를 위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그들 자신의 업에 따라 존재했을 뿐이며, 자신의 업을 늘리며 살았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이와같은 진리를 바로 알아 계율을 잘 지켜 청정한 업을 행할 것이며 마음의 장애를 제거하여 선정을 통해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당신 삶에서 당신과 인연 맺고 살아가는 가족을 비롯한 그 모든 이들에게 과도하게 의지하거나 그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라지말라.

그들이 아무리 당신을 사랑하고 헌신할지라도 사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업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 업의 드라마 속에 당신 또한 당신의 업의 드라마를 보태며 중중무진으로 무수히 많은 이들의 업이 서로 조화롭고도 법계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게 이 아름다운 한 편의 영화를 펼쳐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이들이 자기 영화 속의 온전한 주인공이지 그 누구도 조연은 없다.

그러니 내가 주인공이라고 타인을 내 뜻대로 휘두르려 해서도 안 되고, 나를 위한 희생자가 되게 해서도 안 된다.

물론 나 또한 그들에게 지나치게 의지하거나 간섭하려고 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그들을 사랑하지도 말고 매정하게 인연도 끊고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사랑하되 지나치게 간섭하지 말고, 애정으로 돌봐 주되 과도하게 구속하지는 말라.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함께 삶의 길을 걷더라도 서로가 자기 주체적인 생의 꽃을 피워나갈 수 있도록 저마다의 독립적인 공간을 허용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자식이라 할지라도 그는 나의 소유도 아니고, 내 맘대로 휘두를 수 있는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그들이 지금은 내 뜻대로 잘 살아주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부모님 뜻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업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부모의 생각과는 다소 다를 수 있을지라도, 자녀들 자신만이 가지는 업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만의 특별한 삶의 꽃을 피워낼 수 있도록 그만의 세계를 인정하고 허용하며 무대를 만들어 줄 수 있어야 한다.

부모가 살아 온 인생의 무대만을 고집하며 그 길대로 가야한다고 주입하며 고집하게 되면 자식과의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이 부모를 거스르며 순종하지 못하는 비뚫어진 성격으로 자라서가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 다른 업과 삶의 과제를 인정하지 않고 부모식대로 만을 고집한데서 오는 당연한 현상이다.

자식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부하 직원이든 그들을 내 식대로 구속하지 말라.

그들을 사랑할 지언정 과도하게 집착하지는 말라.

남편에게도 자식에게도 전적으로 기대거나 의지하지는 말라.

저마다 독립적인 자기 자신으로 자신의 빛깔을 뽐내며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어보라.

스스로 남편 없으면 못 살것 같고, 자식 없으면 못 살것 같은 그런 존재가 되지는 말라.

그들이 없어도 삶은 계속된다.

심지어 이 생이 끝나더라도 삶은 계속된다.

죽음의 순간에는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물론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 사랑하며 의지하고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며 우린 누구나 서로 의지하며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관계 속에서 배우고 깨달아 가며 사랑과 지혜는 되찾는 과정이 우리 삶의 이유이다.

그러나 참된 사랑과 지혜는 그 모든 것이 꿈과 같은 것이며 신기루와 같은 것임을 알아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고 욕망하지 않으면서도 그 모든 삶을 누리고 나누고 사랑하며 사는 중도적 실천행에서 오는 것이다.

독자적인 자기 자신의 삶을 자기답게 살아나가되 인연닿는 이들과 함께 관계맺으며 사랑하고 살 수도 있다.

사랑하되 집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의지하되 과도하게 기대지 않을 수 있고, 돌보고 키우되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함께 있되 때때로 홀로 존재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줄 수도 있고, 홀로 존재할지라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인연을 열어둘 수도 있다.

이 양 극단인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길 속에서 조화로운 중도의 길을 걸을 때 삶은 균형 있게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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