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운 풀처럼 자신을 낮추라
-법상스님-
부인을 종처럼 부리면 자신도 종의 남편이 되지만, 여왕처럼 높여주면 자신도 임금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따금 나를 높이는 방편으로 상대방을 낮추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듯 합니다.
상대가 낮아져야 내가 높아진다는 참으로 어리석은 분별 망상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칭찬을 받을 때 내가 낮아지는구나 하는 생각에 질투가 나고 그럽니다.
마음 담아 참되게 칭찬해 주는 것은 상대를 높이는 마음이기에 내 마음이 먼저 높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칭찬 많이하는 사람일수록 남들에게 칭찬 받을 일이 많아집니다.
칭찬받는 일은 복을 받는 일이기에 쉽지만, 칭찬하는 일은 복을 짓는 일이기에 어렵습니다.
스스로를 치켜세우면 끊임없이 낮아지며, 스스로를 누운 풀처럼 낮추면 한 없이 높아지게 됩니다.
스스로를 치켜세움이란 자신이 받을 복을 스스로 까먹는 행위이기에 박복(薄福)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무주상(無住相)’…
무주상 하라는 말은 복 짓고도 지은 바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지은 복은 철저히 잊어버릴 것이며 지어야 할 복은 칼날과도 같이 곧게 세울 일입니다.
자신을 낮추면 우린 정말 낮아지는 줄 압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낮추는 일이야말로 스스로를 무한히 빛내는 일이며 높이는 일입니다.
하심(下心)의 깨우침…
이야말로 수행자에게 있어 정법을 행하는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하심이라는 것은 아상(我相)을 녹이는 수행이며 무아(無我)로 되돌아 감을 의미합니다.
진정 공(空)을 깨우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나를 한없이 낮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행이 잘 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스스로 얼마나 낮추고 있는가를 의미합니다.
스스로 낮추고 낮추어 더 이상 낮출 것도 없는 그 지고한 하심 속에 높고 낮고도 없는 무분별의 무한한 높아짐이 있습니다.
이렇듯 바로 낮춤이 수행일진대…
‘수행했다’, ‘불교 공부 좀 했다’ 하는 사람일수록 ‘했다!’ 하는 아상이 높이지기 일수입니다.
내 마음이 얼마나 아상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가를 봄으로써 내가 얼마나 정법대로 행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 불법을 이야기 하면 ‘저 정도는 나도 알아’, ‘네가 나에게 설법을 해?’ 하지만 큰스님께서 같은 이야기를 하면 훌륭한 설법으로 들릴 수도 있을 일입니다.
하심 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보다 높은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수행자는 나보다 낮은 사람에게 배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하찮게 여기던 미물을, 또는 자연과 우주를 스승 삼아 깨침을 이룰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을 열고 보면 세상 어느 하나 나의 스승 아님이 없습니다.
다만 나의 마음에서 ‘이 정도는 되어야 내 스승이지’ 하는 상을 지어놓고 그 이하라고 판단되면 얕보게 되고 그 이상이라 여겨질 때 낮추는 그 마음이 병통입니다.
똑같은 설법을 100번을 들어도 누구에게 듣느냐에 따라 이해도는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나 하심하는 수행자는 100번을 들어도 하나 하나가 처음 듣는 것 같은 마음이어야 하며 큰스님께 듣든, 나보다 못한 이에게 듣든 분별없는 올곧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세상 모든 이를 나의 스승으로 보아야 합니다.
세상 모든 존재를 나의 부처님으로 보아야 합니다.
법신(法身) 부처님은 이 세상 모든 존재 하나 하나 바로 그 자체라고 합니다.
나와 나의 부모, 친구, 동료, 미워하던 직장상사에서부터 거리를 지나가는 모든 이들, 지하철에서 동냥하는 사람들, TV에 등장하는 아프리카, 인도의 불쌍한 아이들, 나아가 산하 대지 우주 만유 내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이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나툼이라 합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마땅히 나의 스승될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존재 자체는 모두 무분별의 부처님이시건만 우리네 마음 속에 분별이 부처를 만들고 중생을 만들고 그럽니다.
하심 수행은 본래 부처, 자성 부처,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께 법공양 올리는 일입니다.
진정한 배움, 진정한 스승, 진정한 부처는 온 천지에 그대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하심을 통해 온천지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에게서 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