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존중하고 공경할 것인가
-법상스님-
평화로운 오후, 길을 걷고 있던 사람이
대형 광고판이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고,
또 다른 사람은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다가
광고판이 머리에 맞아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복잡하던 길, 복잡하던 마트에서
수많은 사람이 그 광고판 아래를 걷고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불행하게도 그 사람에게, 그 순간에
그 광고판이 떨어지게 되었을까?
일부러 어떤 사람이 광고판 위에 서 있다가
그 사람을 맞추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떨어뜨려
정확히 그 사람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불교에서는 우연이란 없다고 말한다.
그것 또한 그 사람의 인연이요 업이다.
다시말해 그 사람은 그 아래를 정확히
그 시간에 걷도록 되어 있었고,
그 때에 맞춰 그 광고판은 추락을 할 수밖에
없던 인연이었다.
사람의 목숨이 아무런 인연도 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사람이 그 때 죽어야 할 업도 아닌데,
아무 이유 없이 우연으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사라는 것은 정확하게 인연 따라 오고 갈 뿐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하나 생긴다.
어떻게 그 광고판은 그 사람이 그 때
죽을 업이란 것을 알고
그 순간, 정확하게 그 사람을 맞췄단 말인가?
그 인과응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과관계라면
이해가 가지만, 사람과 물질 사이에서
어떻게 인과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람과 물질 사이에서도
인과관계와 인연법은 성립한다.
이 우주의 법칙은, 이 법계의 인연법이라는 법칙은
인간에게만, 혹은 생명이 있는 유정물(有情物)에게만
한정되는 법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뿐 아니라, 유정물 뿐 아니라
모든 무정물(無情物)에게까지 확장되는 우주의 법칙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유정물 뿐 아니라
무정물에게도 자비와 존귀함과 따뜻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보내야 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그 차가 자체 엔진고장을 일으켜 시동이 꺼지면서
고속도로에서 차가 갑자기 서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래서 대형사고가 났고, 많은 사람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그렇다면 그 사고에 연관된 많은 이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우연으로 그 사고를 당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고가 날 만한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사고가 날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마침
그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소멸한다.
우연은 없다.
그렇다면 고장 난 자동차 엔진이
모든 인연법과 인과응보를 환히 알고,
사고가 날 모든 사람들의 운명과 업을 따져 본 뒤
그 순간에 그 일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꾸며낸 것인가?
그렇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해
그 자동차 엔진이 그런 일을 직접 했다기 보다는
이 법계의 인과응보라는 이치가 그 일을 계획하고
자동차 엔진은 거기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큰 틀에서
인연법이라는 법계의 큰 진리의 흐름 속에서
나고 죽으며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까.
이 쯤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자.
광고판이나 자동차 엔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몫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불교에서는 사람 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 나무와 풀과 개미와 이끼들조차
모두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며,
그들을 결코 인간 아래에 두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과 인간은 다르지 않다.
인간이 인간에게 죽음을 당할 수 있듯,
인간이 동물에게도 죽음을 당할 수 있고,
식물에게도, 심지어 위에서 보았듯
무정물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들과 인간은 인연법의 차원에서 서로 동등하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고장 나기 직전의 차였는데 주행 중에는 괜찮았고,
다행히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차량이 고장 났다”고.
그래서 사고 없이 집까지 무사히 잘 왔다고 말이다.
또 어떤 사람은 반대로
아주 좋은 차를 타고 있었으면서도
차량이 문제를 일으켜 집까지 오는데
몇 시간이 더 걸렸을 수도 있다.
늦게 오는 것도 정확히 그럴 만한 인연이고,
사고 없이 빨리 오는 것도 그럴 만한 인연이다.
사업가가 아주 중대한 회사의 업무로
해외 사업가와의 미팅에서 차량 사고로
늦게 가는 바람에
그 큰 투자 사업을 망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차량이 하필이면 왜 그 중요한
순간에 고장이 나는가.
차량 결함만 아니었어도
그 사업가는 대박이 났을 것인데.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차 고장만 아니었다면 완전히 대박이 났을까.
혹시 법계에서 그 사업이 대박이 나기에는
아직 이른 때라서, 아직 그 사람이 성숙하지 않았거나,
복이 부족했거나, 아직은 그 그릇이 작았거나 하는 이유로
차량 고장이라는 인연을 통해
그 사업을 뒤로 미룬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바로 그 차는,
차의 고장난 엔진은
온전한 법계의 이치에 따라
아주 여법한 진리를 수행하게 된 것이리라.
사람만 법계의 이치를,
인과의 이치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유정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처럼 무정물 또한 법계의 일부로써,
진리의 일부로써
바로 그 인연법이라는 우주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차의 탓으로 돌린다.
흥분해서 차 바퀴를 발로 걷어 차거나,
혹은 그 차를 폐차시키고 새 차를 사는 것으로
울분을 풀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차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내 문제다.
차가 바로 그 때 고장이
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주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 법계 우주가 각본을 쓰고 그 차는 단지
조연을 했을 뿐이다.
아니 법계와 차와의 공동감독에
공동주연의 연극이라는 편이 옳겠다.
어쨌든, 주연이었든 조연이었든
내 사업을 망친 직접적인 몫을 한 녀석은 자동차다.
그러니 자동차를 실컷 미워해도 좋다.
그렇지만 자동차를 미워하는 만큼
법계의 일부분인 자동차도 나를 미워할 것이다.
손가락이 내 몸의 일부분이듯,
자동차는 이 우주법계의 일부분이다.
손가락이 아프면 나 또한 아프듯
자동차가 아프면 우주도 아프다.
손가락이 아파 내가 아프면 어떻게든 손가락에게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자동차가 아프면 우주에서도
자동차를 아프게 한 원인제공자에게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다.
바로 나에게.
그러니 자동차에게 분풀이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우주에게 진리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무정물 또한 인간과 유정물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존재이며, 존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유정무정 유형무형(有情無情 有形無形)’의
모든 존재가 다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정이란 나무나 돌 같이 감각이 없는 것을 말하며,
무형이란 형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그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
옛 스님들은
“푸른 대나무숲 모두가 진여(眞如)요,
피어 늘어진 노란 꽃은 반야(般若) 아님이 없다.”고 했다.
[보장론(寶藏論)]에서는
“불성은 모든 것에 가득하고 풀이나 나무에도
깃들어 있으며, 개미에게도 완전히 퍼져 있으며,
가장 미세한 먼지나 털끝에도 있다.
불성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또 『莊子』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답이 있다.
동곽자가 장주에게 물었다.
“도(道)라고 불리는 것, 그것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장주가 말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동곽자가 말했다.
“그것이 있는 곳을 지적해주십시오.”
“개미에게 있다.”
“그렇게 비천한 것에 있습니까?”
“작은 풀에도 있다.”
“그것은 더욱 비천하지 않습니까!”
“벽돌이나 기왓장에도 있다.”
“어떻게 그렇게 비천한 곳에 있을 수 있지요?”
“오줌과 똥에도 있다”
동곽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대 과학에서도 유정물과 무정물을
정확히 구분 짓기 어렵다고
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유정물, 다시말해 생명체는 DNA라는
복제 가능한 유전물질 지니고 있어
생식활동을 통해 자손을 만들어 내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무정물, 무생물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와 광우병의
원인체를 규명하면서 밝혀진 프리온이라는 원인물질이
유전자가 전혀 없는 단백질에 불과하지만
생물체내에서 증식하고 전파되어 확산된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은
전면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 때 비로소 생명과학자들은
생물과 무생물, 유정물과 무정물이란
경계가 따로 없음을 깨닫게 된다.
유정, 무정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분류이자
분별이었을 뿐이지,
본래 그렇게 나뉘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큰 한 바탕으로부터 비롯되어
여러 원인과 결과에 의해 만들어진 모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밝힌
미국의 프루즈너 교수는 97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유정물이나 무정물이라는 것은 단지 이름일 뿐,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 인간이 더 귀하고 천하다고,
더 우월하고 열등하다고 나누어 놓았을 뿐이지,
그 본 바탕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아무리 하찮다고 생각되는 무정물일지라도
그로인해 내가 죽음을 당할 수도 있고,
또한 그로인해 내가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옛 스님들은 무정물이 언제나 법을 설하고 있지만
그것을 듣는 것은 오직 성인들 뿐이라고 했다.
하찮다고 생각되는 발 아래의 꽃을
신비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기 위해 고개를 숙임으로써
나에게 날아오던 화살을 피하게 될 수도 있고,
밤길에 차를 타고 가다가 불쑥 나타난
토끼 한 마리를 피하려다가 사고가 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내 운명을 갈라놓을 수도 있다.
내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이
반드시 인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찮다고 생각했던 무정물이 내 생사를
결정지을 수도 있고,
내 운명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이 우주의 모든 유정물과 무정물들이 모두
나와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하나도 하찮은 것이 없다.
더 귀하거나 천한 것은 없다.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소중한 것 처럼, 사람이 소중한 것 처럼,
똑같이 나무와 풀과 산과 흙과
심지어 자동차와 의자와 집과 컴퓨터 또한 소중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섰을 때처럼,
존경하는 스승 앞에 섰을 때처럼,
부처님 앞에 섰을 때처럼,
그런 마음으로 모든 존재 앞에 서라.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모든 존재 앞에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마음으로 다가 서라.
일체 모든 존재를 존중하며 감사하고
찬탄하며 존귀하게 여기라.
이 세상의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에게
무한한 공경심으로 엎드려 절하라.
매 순간 세상 만물에게 기도하라.
유정물과 무정물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그 모든 것들이 인연법의 진리 안에서
동등한 입장으로 나와 인연을 짓고 있음을 안다면,
세상에는 더 이상 존귀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바로 그 때 우리의 삶은 경이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세상을 향한 지고한 공경심!!
모든 존재를 향한 평등한 자비심!!
이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이 세상을 향한 마음이다.
학창시절에 원소, 원소주기율표라는 것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 때 나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간 학교에서 가르쳤던 것은
인간이 우월하다는 것이었고,
도저히 인간과 자연, 인간과 무정물은
하늘과 땅 차이일 수밖에 없었는데,
인간과 자연, 유정물과 무정물을 이루는 근본 원소는
동일한 것이라는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동일한 원소들이 ‘어떤 인연으로 모였느냐’에 따라
인간도 되고, 동물도 되고, 식물도 되고,
심지어 자동차도 되고, 빌딩도 되고,
집도 되고, 물도 된다.
이것은 유정물과 무정물이 그 어떤 차별도
있지 않다는 반증이 아닌가.
우리는 결국 동일한 것들이 모여서
겉모습의 차이를 만들어 낼 뿐이지,
근원적인 어떤 높고 낮거나,
귀하고 천하거나 하는 차별은 없다.
나는 때때로 많은 사람들 틈에서 호젓하게 벗어나
홀로 산 길을 걸을 때,
아니면 낯설고 인적 드문 여행지를 거닐 때,
그럴 때조차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어떤 ‘존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미세한 느낌을 받곤 한다.
우리가 완전히 혼자 있을 때조차
사실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발딛고 서 있는 대지와 흙과 함께 있는 것이며,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유정물, 무정물이
내 곁에서 따뜻한 도반으로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이러한 통찰 속에서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공경심과 찬탄과 신비 속에 머문다.
어찌 이런 세상이 신비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사소하거나, 하찮거나,
귀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통찰은 우리의 삶을
모든 존재를 향해 활짝 열려 있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향해 존중과 찬탄과
감사와 공경심을 갖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평등한 부처로써 섬기고
시봉할 수 있게 해 준다.
자동차를 타고 멀리 출장을 갈 때
자동차를 향해 동료의식을 가지고,
도반의식을 가지고
존중하며 감사하고 공경스런 마음을 보내라.
내 마음이 자동차를 향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향한
한없는 자비심과 공경심으로 넘칠 때
오늘의 운행은 안전하게 법계에서
자동차와 공동으로 도울 것이다.
설령 오늘 자동차 사고가 날 업이었다고 할지라도
모든 존재를 향한 깊은 존중과 감사와 공경심으로
조금 더 주의 깊게 운전을 함으로써
그 차량사고의 인연이 소멸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이나 식물도 사람 마음이 존중과
사랑과 자비로왔을 때 그 결정이 아름다워지고,
식물도 고요한 파장을 보낸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사람 마음에 따라 세포와 원소의 차원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그러니 모든 기도의 핵심인 감사와 존중과 공경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에게
그 주위의 모든 유정물, 무정물은
아름답고도 청정한 파장과 세포와 결정을
보여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감사와 공경심으로 충만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이 욕심과 화와 질투로 가득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에 비해 사고가 날 확률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의 마음자세가 운명을
바꾸고 업을 바꾼다는 말이다.
업장소멸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운명론이나 숙명론을 거부하지 않은가.
그 이유는 그 어떤 업일지라도,
그 어떤 과보일지라도 마음에 따라,
기도와 수행과 복덕을 얼마나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받아야 할 업장을 뒤에 받을 수도 있고,
다른 방법으로 보다 미세하게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침 공양을 하기 전에
물과 쌀과 야채와 수저와 식탁과
이 집에게 감사하라.
길을 걸으며 길가에 피어난 들꽃과
보도블럭과 신발과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무한한 공경을 보내라.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컴퓨터와 의자와 책상과 볼펜과 자판기와 책들과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도와주고 있음에 감사하라.
이처럼 무정물조차 나보다 못할 것이 없는
법계의 스승이며, 도반이고, 소중한 길벗이라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겠는가.
더 귀한 사람, 더 천한 사람,
더 중요한 사람, 덜 중요한 사람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일지라도,
바보나 정신병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목련존자는 신통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이 생에서의 인연이 다했음을 알고
이교도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
그것이 바로 목련의 인연이었음을 바로 보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반대로 아무리 하찮게 느껴지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게서
내 인생의 가장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아주 나이 어린 어린이가 내 생명을 구해줄
은인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원수였던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니 사실은 내 인생에 귀하고 천한 사람은 없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거나,
좋거나 싫다고 정해진 사람은 없다.
모두가 똑같은 비중으로 존중받아 마땅한
내 삶의 부처요, 관음이고, 내 생명의 귀의처다.
귀한 사람에게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은 평범하다.
그러나 천한 사람에게 그 본질을 알고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의 이치를 몸소 깨닫고 실천하는 수행자다.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행하는 존중을 보내라.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에게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을 주라.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교수님들과 교직원 그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아주 유명했던 큰스님께서
감동스런 법문을 해 주셨던 적이 있다.
법문을 들으며 꼭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스님을 둘러싼 교수님들과 교직원분들의 눈치도 보이고
나 같은 한 명의 대학생의 질문이 거슬릴 것 같아 망설이다가
어렵게 나오시는 스님을 붙잡고 여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스님께서는 자비어린 시선으로 오래도록
내 눈을 진지하고도 진심어린 눈으로 마주보아 주시면서
나의 질문에 스님의 모든 노력을 다해 답변해 주셨다.
그 때 나는 너무도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어린 내 마음은 스님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을 수 있었다.
어쩌면 아주 당연하지만 그 일은 오래도록
아주 특별한 경험으로 자리잡으면서
내 삶의 지침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 그 때 내가 했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은 기억에 없지만,
그 때의 그 존중받는 느낌과
나에게로 향한 그 스님의 집중과 자비와 눈빛은
두고 두고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몸소 깨닫게 해 주신 살아있는 법문으로
나를 밝혀주고 있다.
살아있는 지혜라는 것,
깨달음의 실천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을 보내주는 것,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존재에게
나의 모든 공경심을 바치는 것,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무정물들에게 조차
찬탄과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세상을 향한 차별 없는 열린 마음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부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것이 부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