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노후를 위한 걱정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는가

노후를 위한 걱정,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는가

-법상스님-

먹고 사는 일이라는 것은, 노후의 문제나 미래의 문제는, 그 사람의 복 지은 바에 따라, 그 사람의 행위, 즉 업에 따라 저절로 꽃피어 나는 것이다.

어떻게 씨뿌리고 어떻게 가꾸어 나가며 몸과 말과 생각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미래며 노후 우리의 먹고 사는 일은 결정되게 마련인 것이다.

아마도 수행자의 힘은 이러한 사실을 믿고 실천하는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수행자라면 미래를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 미래라는 것을 안다.

어찌 오지도 않은 미래를 근심하고 걱정하느라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망각하는가.

젊은 날을 욕심과 집착 그리고 이기로써 물들이려 하는가.

맑은 수행자라면 미래의 근심 걱정은 완전히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수행자가 노후를 걱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은 이미 수행자이기를 포기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 사람은 수행자적인 삶과는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그 정도 믿음과 지혜가 없고서야 어찌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에 대한 불안을 당장에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미래에 무얼 먹고 살아야 할까에 대한 불안,노후에 어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불안을 마땅히 떨쳐버리고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

그런 세속의 모든 염려와 잡념들을 놓아버릴 때 그 때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깃든다.

가난의 정신, 자족의 정신에 부응하며 살라.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축적하지 말라.

노후를 위한 준비를 위해 내 젊은 인생의 전부를 희생시키지 말라.

이 세상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 음식이든, 의복이든, 집이든 필요한 만큼은 항상 준비해 두고 있다.

법계는 항상 필요한 만큼의 살림살이를 준비해 두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수행자의 의식주를 책임 져 주신다.

그것을 가져다 쓰는 것은 축적의 유무가 아니다.

많이 축적한 사람이 많이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며, 많이 소유하고 집착하는 사람이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법계의 살림을 가져다 쓰는 것은 오직 비움과 나눔의 정신, 자족과 가난의 정신이 하는 일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내 것’을 많이 축적하고 소유함으로써 법계의 것을 ‘내 것’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둬 놓지 말라.

‘내 것’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가두게 되면 오직 그것만이 내 소유가 되기 때문에 그 밖의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그렇게 작은 소아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은 곧 법계를 울려 법계의 살림살이에서 제외시키고 말 것이다.

그러나 비움과 나눔, 자족과 가난의 정신으로써 맑고 청빈하게 살아가는 수행자는 곧 법계에서 베풀어 주는, 부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필요한 만큼의 의식주를 항상 가져다 쓸 수 있다.

그런 마음의 능력, 마음의 큰 그릇을 가지고 있다.

그 마음의 능력은 스스로 만족할 줄 알며, 가난하게 사는 정신에서 나온다.

삼계의 대도사가 되고자 하는 대장부 수행자가 한낱 몇 년 뒤의 노후를 걱정할 것이며, 미래의 일들을 두려워할 것인가.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여 소인배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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