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노후 걱정 먹고 사는 걱정을 하는가

노후 걱정, 먹고 사는 걱정을 하는가?

-법상스님-

얼마 전에 한 신문사의 설문을 보았는데 노후를 위한 준비자금을 어느 정도 마련해 놓아야 만족하겠는가 하는 요지의 설문이었다.

순간 한 몇 천만원 정도를 생각하고 있던 내 예상은 그야말로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몇 억에서 몇 십억 이상의 노후자금은 있어야 편안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다는 사람들의 생각에 나는 그냥 두 손을 들어 버렸다.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노후자금이란 놀고 먹고 마음껏 소비하면서 보낼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을 말하는 것이리라.

마음껏 놀고 먹으면서 소비하고 보내는 노후는 얼마나 비참하고 노망스러운가.

사람들은 그것을 삶의 행복으로 알겠지만 지혜로운 이라면 그러한 어리석은 노후를 과감히 버릴 것이다.

옛날의 노년기는 삶의 지혜로움이 삶 속에 충분히 녹아 든 어르신이자, 선지식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요즘의 노년기를 보면 어르신으로 대접받기는 커녕 노인네 취급으로 사회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귀찮은 존재 쯤으로 변해 버렸다.

이런 사회 풍토가 바로 먹고 놀면서 보낼 준비가 된 노후를 꿈꾸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폐한 정신이 만들어 낸 사회상이다.

욕심을 버리고, 소유와 축적의 삶을 버리고, 비움과 나눔으로써 삶을 살아가며, 대자연의 운행에 온 존재를 기대고 살아가는 이는 아무리 나이가 들더라도 노망이 들기는 커녕 죽기 직전에까지 성성한 정신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다.

그야말로 나이가 들면서 더욱 지혜는 총명해지고 깊어간다.

그러나 요즘의 새태는 어떠한가.

모든 사람들이 막강한 경제력이 뒷바침되는 행복한(?) 노후를 꿈꾸고 산다.

아마도 예외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꿈을 꾸지 않겠나.

나이 들어 충분한 돈으로 놀고 먹고 마음껏 소비하면서 산다는 것을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행복의 종착역 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내 삶의 행복의 종착역이 몇 억, 몇 십억 대 되는 노후자금에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억지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건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버는 목적이 그렇게 노후에 안전한 삶을 살고, 편안한 삶을 사는 데 가 있는 경우가 많다.

미래에 대한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걱정들이 많은 축적과 소유를 부채질하고 있다.

미래에 잘 살기 위해서 지금 돈도 많이 벌어 놓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악착같이 젊을 때 일해야 한다.

쉽게 말해 나이 들었을 때 입고 먹고 머무는 의식주에 대한 걱정들이다.

물론 사람인 이상 어찌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절약하고 저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미래에 대한, 노후에 대한 지나친 근심과 걱정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된 지혜를 놓치게 하며, 온갖 욕심과 집착, 소유와 이기에 물들게 하는 가장 큰 주범이 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먹고 사는 일이라는 것은, 노후의 문제나 미래의 문제는, 그 사람의 복 지은 바에 따라, 그 사람의 행위, 즉 업에 따라 저절로 꽃피어 나는 것이다.

어떻게 씨뿌리고 어떻게 가꾸어 나가며 몸과 말과 생각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미래며 노후 우리의 먹고 사는 일은 결정되게 마련인 것이다.

아마도 수행자의 힘은 이러한 사실을 믿고 실천하는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수행자라면 미래를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 미래라는 것을 안다.

어찌 오지도 않은 미래를 근심하고 걱정하느라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망각하는가.

젊은 날을 욕심과 집착 그리고 이기로써 물들이려 하는가.

맑은 수행자라면 미래의 근심 걱정은 완전히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수행자가 노후를 걱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은 이미 수행자이기를 포기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 사람은 수행자적인 삶과는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그 정도 믿음과 지혜가 없고서야 어찌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에 대한 불안을 당장에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미래에 무얼 먹고 살아야 할까에 대한 불안, 노후에 어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불안을 마땅히 떨쳐버리고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재산을 모아두지 않고 검소하게 먹는 그런 사람의 해탈의 경지는 텅 비어 아무 흔적도 없기 때문에 허공을 나는 새의 자취처럼 알아보기 어렵다.

잡념이란 잡념은 모두 끊어버리고 먹고 입는 것에 구애받지 않는 그런 사람의 해탈의 경지는 텅 비어 아무 흔적도 없기 때문에 허공을 나는 새의 자취처럼 알아보기 어렵다.

마을이나 숲이나 골짜기나 평지나 깨달음을 얻은 이가 사는 곳이라면 어디이거나 그곳은 즐겁다.

사람들이 없는 숲 속은 즐겁다.

집착을 버린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하지 않는 곳에서 즐거워한다.

그들은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재산을 모아두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하는 이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하고도 청정한 행이다.

이러한 행이야말로 맑고 청정한 업이 되고 복이 되어 우리의 미래를 밝혀 줄 것이다.

검소하게 먹는다는 것은 먹는 일에 집착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며, 먹는 일 때문에 근심 걱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 사는 일이 먹고 사는 일인데 먹고 사는 일에 근심 없이 완전히 내맡기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의 경지는 텅 비어 흔적이 없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잡념이란 잡념은 다 끊어버리고 먹고 입는 것에 구애받지 않는 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허공과 같은 대 자유인의 살림살이이다.

우리는 먹고 입는 것에 너무 관심이 많고 욕심이 많기 때문에 먹고 입는 문제로 인해 온갖 욕심과 집착을 늘려가곤 한다.

그러나 입고 먹으며 사는 일, 재산을 모으는 일 등에 집착이 많은 사람은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그곳은 괴롭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 일체의 잡념을 여읜 사람들은 마을이나 숲이나 골짜기나 평지나 그 어떤 곳이든 항상 즐겁다.

먹고 사는 일, 노후를 준비하는 일, 재산을 모으는 일 등에 대한 집착을 버린 이들은 설사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하지 않는 곳에서라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은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예수님도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늘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늘의 새는 그 누가 거두지도 키우지도 않지만 이 대자연 법신의, 하느님의 이치에 순응하면서 저절로 키워지고 있다.

하늘의 새도, 땅위의 모든 나무며 식물들도, 그 어떤 존재들도 모두가 있는 그대로 충만한 법계 속에서 하느님의 세계인 이 땅 위에서 온전하고 충만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유독 인간들만이 먹거리를 만들어 내야 하고, 씨앗을 뿌려야 하며, 축적하고 저장해야 한다.

인간들만이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여 온갖 욕심과 이기를 축적해 가고 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

그런 세속의 모든 염려와 잡념들을 놓아버릴 때 그 때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깃든다.

가난의 정신, 자족의 정신에 부응하며 살라.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축적하지 말라.

노후를 위한 준비를 위해 내 젊은 인생의 전부를 희생시키지 말라.

이 세상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 음식이든, 의복이든, 집이든 필요한 만큼은 항상 준비해 두고 있다.

법계는 항상 필요한 만큼의 살림살이를 준비해 두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항상 수행자의 의식주를 책임 져 주신다.

그것을 가져다 쓰는 것은 축적의 유무가 아니다.

많이 축적한 사람이 많이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며, 많이 소유하고 집착하는 사람이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법계의 살림을 가져다 쓰는 것은 오직 비움과 나눔의 정신, 자족과 가난의 정신이 하는 일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내 것’을 많이 축적하고 소유함으로써 법계의 것을 ‘내 것’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둬 놓지 말라.

‘내 것’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가두게 되면 오직 그것만이 내 소유가 되기 때문에 그 밖의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그렇게 작은 소아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은 곧 법계를 울려 법계의 살림살이에서 제외시키고 말 것이다.

그러나 비움과 나눔, 자족과 가난의 정신으로써 맑고 청빈하게 살아가는 수행자는 곧 법계에서 베풀어 주는, 부처님께서, 또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필요한 만큼의 의식주를 항상 가져다 쓸 수 있다.

그런 마음의 능력, 마음의 큰 그릇을 가지고 있다.

그 마음의 능력은 스스로 만족할 줄 알며, 가난하게 사는 정신에서 나온다.

삼계의 대도사가 되고자 하는 대장부 수행자가 한낱 몇 년 뒤의 노후를 걱정할 것이며, 미래의 일들을 두려워할 것인가.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여 소인배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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