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스님─부처님을 만나려면 집착서 벗어나라

부처님을 만나려면 집착서 벗어나라

-지광스님-

썩어질 눈으로는 부처님을 볼 수 없다.

유한의 것으로는 무한을 볼 수 없다.

진심으로 부처님을 만나려거든 유한의 즐거움을 너무 탐하지 말라.

왜 집착을 떠나라 하는가? 유한을 떠나기 위해서다.

집착하는 마음으로는 유한을 극복하기 어렵다.

집착하는 마음은 우리들을 유한의 노예로 만든다.

유한의 세계, 물질의 세계는 온통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유한의 세계는 모두 이기심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이기심은 결국 언젠가는 사라져야 하는 것이기에 눈으로 보이는 세계 역시 모두가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들뿐이다.

눈사람을 만들어 본적이 있는가? 조그만 돌멩이를 눈으로 단단히 뭉쳐 핵으로 만든다.

그 다음에 그것을 굴려나가며 눈사람을 만든다.

강한 이기심이 핵이 되어서 점차 부풀어 오르면 종양이 되고 암이 된다.

유한의 세계는 갖가지 질병이 가득하다.

모두가 이기심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너무도 유한에 치우쳐 무한과 만나는 시간이 너무도 짧다.

우리의 본질이 무한인데 유한의 욕망의 세계 물질의 세계에만 탐닉하다 보니 몸을 썩게 만드는 병들만이 난무한다.

우리는 무한과 함께 하지 않으면 생명력을 이어나갈 수가 없다.

우리의 생명에너지는 호흡을 통해 허공으로부터, 무한으로부터 얻어진다.

왜 침묵을 금이라 하는가? 침묵 가운데 우리는 무한과 만나기 때문이다.

본질과 만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질은 부처님이며 무한 사랑이다.

왜 참선하라 하는가? 왜 기도하라 하는가? 무한과 만나기 위해서다.

부처님과 만나기 위해서다.

덩어리 진 것을, 유한의 것들은 무한만이 녹일 수 있다.

미국의 교도소에서 참선을 가르쳤더니 재범률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보고가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가만히 들어앉아 침묵 속에서 누굴 만나게 되는가? 참자기, 부처님을 만나게 될 것 아닌가.

부처님의 준엄한 비판이 마음속으로부터 울려올 것 아닌가.

스스로의 잘못을 통렬히 돌아볼 수밖에 없으리라.

현대인들이 참선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왜인가? 무한과 만나는 가운데 갖가지 스트레스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란 무엇인가? 이기적인 내가 있기에 스트레스가 생긴다.

참선은 가능한 한 이기적인 나를 부수는 작업이다.

번뇌의 나, 망상의 나, 욕망의 나를 녹여 내리며 무아의 경지를 증대시켜 나간다.

부처님의 나를 강화시켜 나간다.

자연히 스트레스는 녹아내리게 될 것이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이이라니 갖가지 병적증세도 완화될 것이다.

진정 우리들은 무한과 항상 하나 돼야 한다.

항상 무한을 만나야 한다.

무한이 우리의 본질이기에 항상 참선 속에 기도 속에 살아야 한다.

수행 속에 살아야 한다.

그 가운데 무량가피가 있을 것은 당연하다.

현실 가운데 끝없는 초월의 길을 가라.

초증보리 방편문(超證菩提 方便門)이라 하지 않는가.

초월적인 삶을 살며 깨달음의 길을 간다면 무량한 지혜 방편문이 열린다.

초월세계는 부처님 나라로 통한다.

부처님의 눈을 열어라.

물질만이 관심인 눈으로는 부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열심히 벌어 무얼 하려는가? 우리는 잠자듯이 죽는다.

죽으면 재물이 무슨 소용인가? 물질은 오직 이 땅에 사는 동안만 필요하다.

죽으면 육신의 모든 감각은 문을 닫는다.

노후대비만 하지 말라.

현실 속에 사후대비도 열심히 하라.

아무리 생전에 겉으로만 사랑하는 척 친절해도 소용없다.

겉과 속이 같은 삶을 살라.

겉과 속이 다른 삶은 재앙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산다.

유한의 껍데기세계와 무한의 부처님 나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우리가 죽으면 적나라한 진면목이 드러난다.

껍데기가 죽어버리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슨 소용인가? 항상 참 나와 만나라.

무한과 만나라.

무한과 만나는 시간을 좀 길게 가지라.

참선을 해보라.

열심히 기도를 해보라.

부처님의 위대한 가피를 더욱 더 강렬히 증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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