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마음 너그럽고 따뜻하게

마음, 너그럽고 따뜻하게

-법정스님-

제가 살고 있는 강원도는 눈의 고장입니다.

그런데 지난 1월 중순께까지도 눈다운 눈이 내리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몇몇 지역에서는 이름도 생소한 기설제(祈雪祭)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 덕인지 최근 몇 차례 눈이 내려 이제야 겨울다운 풍경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얼음 위에 내려 쌓인 눈은 일종의 보호막이 되어 줍니다.

개울이 바닥까지는 얼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한겨울에도 두터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눈은 내리지 않고 영하 20도 아래로 기온이 떨어지는 강추위가 이어져 겨울 내내 폭포는 빙벽이 되고 개울은 빙하가 되었습니다.

개울바닥까지 다 얼어붙어버린 겁니다.

그만큼 춥습니다.

강원도에서 15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올해처럼 온통 얼어붙은 겨울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이런 환경은 사람을 메마르게 합니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고 도끼로 얼음을 깨도 물은 못 얻고 팔만 아픕니다.

물 없이 살 수는 없으니 얼음이라도 깨다 녹여 식수와 생활용수로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흐르는 물이라곤 전혀 없이 모두가 빙판이니 살아가기가 몹시 힘들었습니다.

덕분에 한 방울 물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아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그런 겨울이었습니다.

다행히 요즘은 눈을 떠다 쓸 수 있게 되어 힘이 좀 덜 듭니다.

‘심여수(心如水)’란 옛말이 있습니다.

물은 마음과 같고 마음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은 흘러야 합니다.

흐르는 것이 물이 살아있다는 징표이고 또한 물의 생태입니다.

물은 흐름으로써 자신도 살고 만나는 대상도 살립니다.

물이 한 곳에 갇혀 있거나 고여 있으면 생명력을 잃어 마침내는 부패하고 맙니다.

저는 이번 겨울 새삼스럽게 물이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날마다, 시시각각 몸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물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배우고 익힌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굳어 있거나 무엇에 의해 갇혀 있으면 그것은 온전한 마음이 아닙니다.

병든 마음입니다.

마음은 물과 같다 했습니다.

우리 마음도 물처럼 흘러야 되는데 어디에 갇혀 있거나, 고여 있거나, 어떤 상황에 의해 얼어붙게 되면 온전한 마음이 아니고 병든 마음이 됩니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 탓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지옥도 만들고 천당도 만듭니다.

물은 흘러야 그 생명력을 유지하듯 마음도 살아서 움직여야 건전해집니다.

흔히 절에서 ‘마음 닦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보이면 손으로 문지르든가 걸레로 닦겠지만 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닦는다는 표현은 매우 관념적인 것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마음을 쓰는 일’ 즉 ‘용심(用心)’입니다.

마음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마음 쓰는 일이 곧 수행입니다.

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삶의 꽃이 아름답게 필 수도 있고 꽉 막힌 벽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법구경》 첫 구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만약 생각 없이 가시 돋친 말을 친구에게 던졌다면 그 말이 친구에게 닿기도 전에 내 마음에 먼저 가시가 박힙니다.

온전한 마음이 아니었기에 내가 더 괴로운 겁니다.

마음을 잘 써야 한다는 것은 사람답게 살기 위한 기본적인 요건입니다.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릅니다.

마치 그림자가 그 실체를 따르듯이.

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내 삶이 달라집니다.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마십시오.

각자 자기 마음의 작용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한 생각을 일으켜서 내 마음을 옹졸하게 쓸 수도 있지만 또 너그럽게 쓸 수도 있습니다.

차디차고 냉혹하고 매정하게 쓸 수도 있지만 봄바람처럼 훈훈하고 너그럽게 쓸 수도 있습니다.

한 생각 모질게 마음먹어서 굳게 닫게 할 수도 있지만 활짝 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중 어떤 것이 진짜 내 마음인지는 각자 느낌으로 압니다.

내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되면 본마음입니다.

반면에 뭔가 불안하거나 불편하고 개운치 않다면 본마음이 아닙니다.

수행이란 한 마디로 어렵게 화두하고 염불하기 전에 마음 쓰는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 하나로는, 마음 자체만으로는 안 됩니다.

마음 쓰는 사물이나 이웃 등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주관적 입장, 자기 본의로 생각하면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없습니다.

대인관계를 통해서 현재의 자신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하루하루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내 마음을 제대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이웃은 내 마음을 밝게도, 어둡게도 할 수 있는 매개체(대상)입니다.

여러분이 보다 당당하게 행복하게 어디에도 거리낌 없이 살 수 있으려면 만나는 이웃에게 보다 따뜻하게 내 마음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웃을 위한 배려도 되지만 내 자신의 삶을 위해서도 그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무수한 사물들을 만납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물건도 대하고 생각지도 못한 어떤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피십시오.

그럼 내 마음을 잘 쓰고 있는지 혹은 잘 못 쓰고 있는지 스스로 판단이 설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마음을 닦는다고 하지만 실은 마음을 쓰는 겁니다.

마음을 바르게 써야 바르게 닦입니다.

그래야 빛이 납니다.

친구를 통해서 혹은 자식이나 남편 또는 아내를 통해서 자신의 실체를 그 때 그 때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의 경우 그들은 우연히 만난 사이가 아닙니다.

몇 생 동안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기억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인연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이번 생에 한 가족으로 만난 겁니다.

그런데 단란하게 지내는 가정도 있지만, 원수 보듯이 서로가 미워하면서 지내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중생들의 구조입니다.

싫어, 싫어하면서, 어떤 대상을 미워하면서 살게 되면 내 자신이 미워집니다.

한 생애를,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세월을 그런 식으로 스스로 먹칠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을 한 번 돌이켜야 합니다.

지극히 관념적인 소리이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됩니다.

내 남편이나 내 아내가 부처나 보살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처음엔 어렵지만 곧 부처나 보살이 따로 있는 게 아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법당에 모신 부처님은 불상(佛像)일 뿐입니다.

진짜 부처님이 아닙니다.

진짜 부처님은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청정법신이라 하지 않습니까.

금생에 부처님 법을 만나서 산다는 것은 묵은 업을 청산하고 새롭게 살고자 하는 겁니다.

보다 더 밝고 당당하게 살기 위해서 절에도 가고 교회도 가고 그러지 않습니까.

자기 생각을 돌이키는 겁니다.

남을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면 내 스스로가 싫고 미운 존재가 되는 겁니다.

화를 잔뜩 내게 되면 그 독의 피해를 내가 입지 않습니까.

빨리 생각을 돌이켜야 합니다.

지극히 관념적인 소리이긴 하겠지만 누군가에게 서운한 일이 있더라도 전생에 내가 서운하게 하고 무례하게 했던 과보로 금생에 이렇게 받는구나 하고 생각을 좋은 쪽으로 자꾸 돌이켜야 합니다.

까닭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원인이 있어 결과를 이룹니다.

인간적인 갈등이라는 것들은 – 친구간의, 가족간의 – 다 사소한 업들이 쌓이고 쌓여서 자꾸 커지는 겁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에서 마음을 돌이켜 풀어버리면 메아리가 있습니다.

금생에 한 가족으로 만난 인연에 고마워하십시오.

내가 먼저 마음을 돌이켜 풀어보십시오.

만약에 그런 것이 풀리지 않으면 금생 뿐 아니라 내생까지도 과보가 이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인과의 고리입니다.

해탈이란 뭡니까.

인과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인과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자꾸 좋은 쪽으로 써야 합니다.

물은 흘러야 하듯이 우리 마음도 보다 너그럽고 따뜻하게 흘러야 합니다.

그래야 내 삶이 달라집니다.

활짝 열린 마음이 내 마음이고, 겹겹으로 닫힌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닙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몇 번 소개했던 달마스님의 ‘마음법문’ 중에서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 한 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네.‘ 이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너그러울 때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한 번 뒤틀리게 되면 바늘 하나 꽂을 여유가 없어집니다.

그것이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본마음입니다.

그러나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는 옹색한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닙니다.

악마의 마음입니다.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게 되면 내 자신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내 삶이 어두워집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하는 유행가 가사가 있지만 제 마음 자기가 모르면 누가 압니까.

내 마음은 내가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자꾸 좋은 쪽으로 돌이킬 줄 알아야 합니다.

맞은 편 입장에서 생각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본의로 생각하니 마찰이 옵니다.

입장을 바꿔서 맞은 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일이 없습니다.

혹시 맺히거나 굳게 닫힌 마음을 아직까지도 지니고 있다면 오늘, 해제날 다 풀어버리십시오.

가벼워야 합니다.

짐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인생의 새 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안팎으로 거리낌이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사람다운 삶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어디에도 갇히거나 구겨지지 않고 기죽지 않고 그 마음을 꽃처럼 활짝 열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자꾸 그런 생각을 하고 또 해 현재의 내 마음을 내가 바로 써야 합니다.

미운 사람이나 고운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부처요, 보살의 화신이다 생각하십시오.

나를 깨우치기 위해서 내 가까이에서 저런 행동을 일부러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자꾸 안으로 거두어들여서 만나는 이웃마다 부처나 보살로 생각하십시오.

그런 정신이 쌓이고 쌓이면 내 스스로가 부처와 보살이 됩니다.

이제야 비로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염하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내 자신이 바로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이 되는 겁니다.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부른 사람이 무자비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내 자신이 관세음보살이 되었기에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기도로써 힘을 얻었다, 영험을 얻었다 함은 자기 안에 있는 잠재력을 기도를 통해서, 불보살의 가르침을 통해서 활짝 꽃피우는 일입니다.

이것이 마음 쓰는 일이고 또는 마음 닦는 일입니다.

각자 삶의 현장에서 화창한 봄을 맞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풀어버립시오.

그래야 삶이 향기로워집니다.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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