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스님─목 말라야 우물을 파겠는가

목 말라야 우물을 파겠는가

-월호스님-

홍주(洪州) 태안사(太安寺)의 주지는 경(經)과 논(論)을 강론하는 강사(座主)였는데 오직 마조스님을 비방하기만 하였다.

하룻밤은 삼경(三更)에 귀신사자(鬼使)가 와서 문을 두드리니, 주지가 물었다.

“누구시오?” “귀신세계의 사자인데 주지를 데리러 왔다.” “내가 이제 예순 일곱인데 40년 동안 경론(經論)을 강의하여 대중들에게 공부를 하게 하였으나 말다툼만 일삼고 수행은 미처 하지 못했으니, 하루 밤 하루 낮만 말미를 주어 수행케 해 주시오.” “40년 동안 경론을 강의하기를 탐하면서도 수행을 못했다면, 이제서 다시 수행을 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한창 목마른데 우물을 파는 격(臨渴掘井)이니,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마조록(馬祖錄)] 평생 공부해도 생사해결 못할 수도 항상 자신 수행법 점검 철저히 해야 당시 마조도일스님은 홍주 개원사에 계셨는데, 태안사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모양이다.

태안사의 주지는 40년 동안 경론을 강의하던 강사였는데, 오직 마음법 만을 강조하던 마조스님을 사뭇 비방하기만 하였다고 한다.

사실 가장 가까운 곳에 지내는 사람일수록 가장 큰 경쟁상대가 되는 법이다.

따라서 강사였던 주지는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자랑하며 은근히 마조스님을 비하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저승사자의 방문 앞에서는 학식과 변재가 소용이 없음을.

예컨대 불교나 참선의 이치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달통하거나 혹은 대단한 말재간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그대로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즉 이러한 학위나 말재간이 비록 생계(生計)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생사(生死)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어쨌든 태안사 주지는 저승사자의 급작스런 방문을 받고서야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어, 다만 하루 동안이나마 말미를 얻고자 간청하고 있다.

말 그대로 임갈굴정(臨渴掘井), 즉 목마름에 다다라서야 우물을 파는 격이 되었다.

이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며, 강 건너 불로 볼 수 없는 현실이다.

강사가 되었든 주지가 되었든 혹은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깊이 헤아려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각종 매스컴을 통해서 수없이 사건사고를 접하면서도 강 건너 불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에게 돌연 이와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또한 자신의 현재 수행방법에 확신이 있는지? 사자들이 물러간 뒤에 주지가 이 일을 생각했다.

“귀신 사자는 허락했으나, 나는 하루 동안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가?” 아무 대책도 없었다.

날이 밝기를 기다릴 겨를도 없이 곧 마조스님께로 가서 앞의 일을 자세히 말씀드리니, 스님께서는 그를 곁에 서 있게 하였다.

날이 새자 귀신사자는 태안사로 가서 주지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다시 개원사로 와서 주지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이때 마조스님과 주지는 사자를 보았으나 사자는 스님과 주지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어째서 저승사자는 두 스님을 볼 수가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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