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국스님─지금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지금 사랑할 줄 아는 사람

-혜국스님-

심은 것을 어찌하랴 불보살님들은 씨앗 심기를 좋아하는 데 반해, 중생들은 열매 얻기를 좋아합니다.

불보살님들은 씨앗을 심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거두는데, 중생들은 씨앗을 심지도 않고 열매를 기다립니다.

행복의 씨앗, 깨달음의 씨앗을 심어놓고 행복과 깨달음의 열매가 열리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씨앗을 심지 않은 것은 생각지도 않고 “야 이놈아, 왜 이렇게 나를 애태우느냐?” 며 결과만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본들 행복과 깨달음의 열매가 열릴 까닭이 없습니다.

이제 행복과 깨달음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어떻게 씨앗을 심고 가꾸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에 앞서 여담을 조금 풀어보겠습니다.

‘애모’라는 유행가에,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가사처럼, 나도 재가불자들 앞에 서면 작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나는 늘 불자들이 불교공부에 대해 물어오기를 기다립니다.

“스님, 공부를 하다 보니 여차여차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이 의문에 대해 속 시원히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이런 질문을 자꾸 하면 나는 커질 수 있습니다.

내가 잘 아는 문제요, 대화를 함으로써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와서 묻는 말이 전혀 다를 때가 있습니다.

“스님, 집안에 우환이 생기는데, 변소는 어디로 옮 기는 것이 좋을까요?” “올해 우리 아이가 고3입니다.

원하는 대학에 가겠습니까?” “큰 딸을 결혼시키려 합니다.

어떤 직업의 남자가 어울리겠습니까?” “올해 이사 운은 있는지요? 어느 방위로 가는 것이 좋습니까?” 참으로 절에 와서 물어서는 안 될 질문을 할 때마다 나는 작아집니다.

그런 신도들 앞에 서기만 하면 자꾸만 작아져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신도들에게 부처님의 법을 가르쳐주어 행복과 깨달음의 씨앗을 심고 그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인데, 엉뚱한 것만 물어오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가끔씩 나는 절을 점집으로 알고 스님을 점성가로 착각하여 엉뚱한 질문을 하는 이들에게 호통을 치기 도 합니다.

그리고 ‘삶의 모든 것이 스스로가 심은 씨앗을 가꾼 결과이니만큼 운명적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주름살을 예로 들겠습니다.

우리가 아기였을 때는 피부가 매끄럽고 주름 하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주름살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럼 이 주름살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간직하고 나온 것입니까? 어떤 재수 없는 나쁜 사람이 쫙 그 어놓고 간 것입니까? 후자가 아니라, 틀림없이 우리 가 간직하고 온 것이요, 그래서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다만 웃을 때 ‘호호호’하고 예쁘게 웃는 사람과 ‘아휴, 못살아’하면서 찌푸리는 사람의 주름살 모양에 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름살을 어떤 모양으로 만들 것인지는 지금의 우리에게 달려 있지만, 있고 없고 를 우리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간 직하고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집안이나 환경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는 자식들이나 남편 아내로 인해 생기는 희로애락, 돈, 명예, 건강 등도 이미 간직하고 나온 것입니다.

– 사람이 죽어서 명부세계로 가면 염라대왕은 이미 성적표를 보고 있습니다.

죽기 전 인생을 채점하여 30 점이 나왔다면 염라대왕은 그 사람을 지옥으로 보냅 니다.

그리고 80점이 넘으면 정중히 대우합니다.

“여기오실 분이 아닌데 왜 오셨습니까? 천상이나 극 락으로 가실 수 있게 호위하겠습니다.” 그런데 항상 50점 정도의 중간 점수가 문제입니다.

60점 정도면 괜찮은 집안에 태어날 수 있건만, 점수 가 약간 모자랍니다.

인간으로 태어날 수는 있지만, 부모 잘 못 만나 고생할 팔자이거나 병에 시달리며 살게 될 운명입니다.

이에 염라대왕은 묻습니다.

“고약한 시부모 만나고 말 안 듣는 아들딸을 낳고 살겠느냐? 평생 병들어 살겠느냐? 아니면 고아로 살겠느냐?””셋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차라리 몸에 병이 있는 편이 낫습니다.” 이 사람은 다시 태어나 평생 병을 달고 살게 됩니다.

본인이 이 병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현세에서 받는 과보를 염라대왕의 판결에 빗 대어 이야기하였지만, 결국은 인과응보입니다.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입니다.

금생에서 일어나는 일들 은 모두 전생에 내가 씨를 심고 가꾸었거나, ‘내가 받겠노라’고 원을 세운 일들입니다.

‘나 스스로가 원한 것이요 맺은 것’인데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월간 [법공양]6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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