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보이지 않는 공덕
-법상스님-
매일 매일 생활 속에서 수행하고 정진하고 그렇게 실천하다가 어느날 문득 ‘내가 뭐 하고 있나’ 싶고 ‘수행이 되고 있기는 한건가’ 싶고 ‘지금 잘 가고 있나’ 싶은 의심의 마음이 들 것 같습니다.
딱 눈에 보이는 표준이 정해져 있어서 실천하고 수행하는 만큼 딱 확인할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이 수행이란 것은 그렇게 딱 정해져 있지 않단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으로 인식하는 습관이 되어 있어서 무엇이든 육근으로 감각적인 인식을 해야 비로소 해 놓고도 뭐 ‘한 것’ 같지 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가 없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초발심도 퇴색해지고 자꾸 힘만 들고, 또 의심 들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나 매번 말하지만 눈에 보이는 세계는 참 작다고 그랬어요.
눈에 보여지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넓고 원만한 것입니다.
이쪽 언덕 위에 있는 사람이 저쪽 뒤에서 한계단 한계단 올라오는 사람을 볼 수가 있나요? 분명 그 사람은 걸어 올라오고 있지만 우린 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걸음 걸음이 쌓여 어느 순간이 되고 나면 비로소 그 모습을 딱 볼 수가 있단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한발 한발 걷고 있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우리가 죄업을 계속해서 지을 때 당장에 그 과보가 나타나지 않다보면 죄 지은 것도 모르고 당장에 잘못되는 것도 없다보니 ‘괞찮겠지’ 하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당장에 지은 것이 보여 지지 않는다고 내 안에 그 죄의 업장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잠시 보여지지 않고 있을 뿐이예요.
분명 인과 연 이 닿는 그 인연화합의 순간이 오면 죄의 과보를 온당 하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작은 죄업들이 쌓이다 보면 어느날 불현듯 큰 병에 걸려 괴로워하기도 하고, 교통사고가 나 오랫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하기도 하고, 잘 되던 일이 결정적인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모르다 보니 당장에 돈 좀 더 벌고, 명예나 권력 지위 좀 올라가는 일이라면 아무리 나쁜 짓이라도 쉽게 쉽게 저지른단 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괴롭고 힘겹더라도 내가 가야 할 길을 차라리 힘겹게 걸어가지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모습으로 이 법계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쉬운 길을 택하진 않을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그렇습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돈 벌어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당장에 좀 못사는 모습도 있고, 온갖 술수를 다 쓰면서 교활하게 사는 사람이 당장에 더 잘 살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여지는 세계를 가지고 세상 열심히 살 필요 없다고 해선 안되는 것과 같습니다.
분명 우리 안에는 그 모든 업들이 다 쌓여 있습니다.
다만 지금 당장 그 인에 맞는 연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지요.
결국에 그 인은 어느날 연을 만날 것을 왜 모르는 것인지요.
그래서 잘나가던 사장, 회장님이 어느 하루 아침에 죽기도 하고, 또 망하기도 하고 큰 병에 걸려 괴로움에 시달리기도 하지 않습니까.
당장 우리 안에 쌓인 업이 터지기 직전에 놓여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내 과거 전생의 죄의 업연을 당장 이 다음 순간 받게 될지 어찌 알겠습니까.
딱 일이 닥치고 나서 그 때 가서 매번 후회만 하겠습니까? 미리 미리 마음 닦는 삶을 살아야 하고, 복 짓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앞으로 언제 닥칠 지 모르는 죄업들을 닦아가야 합니다.
우리들 눈에 보이기로는 열심히 매일 같이 수행하고, 또 남들을 위해 열심히 배풀면 손해보는 것 같고, 아무런 이득이 없는 것 같고 많은 의심이 들겠지요.
아무리 열심히 수행해도 금강경 독경하고, 좌선하고, 염불하고 1080배, 3000배 절하고, 사경하고, 법문 듣고 수많은 경전과 어록 법문집을 탐독 하고 아무리 해도 공부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다 보니, 마음공부 한 것이 수치적으로 딱 나타나지 않다 보니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수행을 하고 있긴 한건가’ 또 ‘이 수행이 내 삶에 도움이 되긴 하는건가’ 하는 의심이 자꾸 든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 법계의 인다라망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하나라도 철저하게 결과를 가져오는 법입니다.
아무리 사소하게 신구의 삼업을 지었더라도 분명히 그 과보는 언젠가 받게 마련이듯,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부처님 전에 엎드려 절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독경하면 하는 만큼 0.1%의 오차도 없이 우리 안에 수행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단 말입니다.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 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들판에서 모래로 탑을 쌓거나, 손톱이나 나무가지로 부처님을 그리거나,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을 찬탄하거나, 한송이 꽃으로 부처님 앞에 공양하거나, 불상 앞에 나아가 합장하여 예배하거나, 산란한 마음으로 한 번만 염불하더라도, 그와 같은 인연들이 모여 성불 인연을 맺는다.
어떻게 보면 아주 사소하고 별 것 아닌 일 같지만 우리가 일으킨 한마음은 그대로 법계를 장엄하고 법계를 밝히며 그대로 성불인연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염불하고 독경하고 좌선하고 절하고 생활 속에서 하루 하루 마음공부, 생활수행하는 그 공덕이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매일 매일 일상 속에서 수행하는 일은 작게는 죄의 업장을 녹이고, 밝은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며, 크게는 성불인연을 짓는 일이라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수행의 결과가 눈에 딱 나타나지 않는다고 쉽게 포기하거나 진리를 쉽게 의심하거나 또한 눈에 딱 보여지는 것을 찾아 나선다거나 그러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요즘에야 모든 것이 계량화 되고 수치화 되다보니 수행이란 것도 눈에 딱 보여지도록 한계단 한계단 만들어 놓고 또 그 다음 계단 오를 때 마다 비싼 수강료를 내고 그러는 곳도 더러 있지마는 가만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마음공부를 돈으로 혹은 수치적으로 계산하고 따질 수 있겠습니까.
지금 현재 실천하고 계시는 법우님들의 실천수행에 굳은 믿음을 가지세요.
보여지지 않더라도 분명 하게 한걸음 한걸음 내딛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 면 벌써 그 공덕을 받았는지 몰라요.
다만 수행의 공덕으로 나쁜 일이 일어날 것 작게 일어나거나 일어나 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괴로운 일이 있어도 늘 감사하고 삽니다.
큰 병이 걸렸어도 죽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작은 병에 걸려 놓고도 하필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려야 하느냐고 괴로워 하고 세상 원망하고 신을 원망하는 사람이 있지 않아요.
굳은 믿음을 가지고 하루 하루 꾸준하게 실천할 수 있는 자신의 생활수행을 정하셔서 꾸준하게 정진해 나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