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이것이다’ 규정짓지 말라
-법상스님-
불교는 온 우주의 본래 바탕은 모두가 불성으로 ‘하나’라고 주장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렇다면 온 우주의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의 다양성은 쉽게 무시될 것이다.
그렇다고 불교가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전체성, 귀일성이 무시되고 말 것이다.
하나도 아니고, 하나가 아닌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하니 어느 한 쪽을 선택하기를 좋아하는 중생의 속성상 불교는 도대체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불교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거나, 어느 한 가지 가르침을 따르거나, 어느 한 가지 진리를 주장하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에서는 그 어떤 선택이나 주장이나 극단적인 집착이 없다.
어떤 특정한 가르침을 강조하거나,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불교는 일원론인가 다원론인가 아니면 유신론인가 무신론인가 범신론인가 범재신론인가 하는 그 어떤 단어에도 불교를 가둘 수는 없다.
가두고 규정짓는 순간 이미 그것은 불교가 될 수 없다.
심지어 가장 뛰어난 최고의 진리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불교다’라고 하는 순간 불교는 사라지고 만다.
불교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느냐 마느냐’의 종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의 종교라고나 할까.
다만 세상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뿐, 있는 그대로 보는데 무슨 이름이나 규정이나 선택이 필요한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일 뿐 어떤 것을 특별히 강조할 것도, 지적할 것도, 규정지을 것도 없다.
다만 볼 뿐 어떤 것도 붙잡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진리를, 어떤 특정한 요점을 강조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불교는 너무 어렵고, 불교는 도대체 어떻게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삶의 본질을 살피고자 한다면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을, 사물을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한다.
언제나 생각이나 사고의 영역에서는 어떤 한 가지를 선택하기를 바랄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하고, 그 중 어느 한 가지를 강조해 주기를 바랄 것이다.
언뜻 보기에 그것이 쉬워 보이니까.
그러나 우리의 생생한 삶을 지켜보라.
생각이나 사고를 잠시 쉬게 하고 삶이 저절로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고 다만 지켜본다면 그 어떤 관념도, 사상도, 진리도, 견해도 심지어 극단적인 서로 다른 사상 이라도 실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생각을 만들어내면 생각에 속박당하고, 견해를 만들어내면 견해에 속박당하며, 진리를 만들어내면 진리에 속박당한다.
심지어 부처를 깨달음을 만들어내면 부처에 깨달음에 속박당하고 마는 기막힌 아이러니가 있다.
우리의 생각이나 관념 속에 있는 부처나 깨달음은 그저 부처에 대한 생각이고 관념일 뿐 그것이 부처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부처는 이러한 것’이라고 규정짓고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을 좇아다니며 수행을 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부처를 만들어 놓으면 부처에 이르지 못한다.
깨달음이 어떤 것이라고 규정짓는 순간 깨달음은 멀다.
관념으로 생각으로 불교를 공부하고자 애쓰는 모든 작업은 작은 방편의 공부는 될 지언정 궁극이 되지는 못한다.
모든 관념과 생각과 애씀과 규정과 노력과 편견과 선택을 놓아버리고 다만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모든 것은 언제나 그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