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낫한스님─이해와 연민은 나약하고 비겁한 감정이 아니다

이해와 연민은 나약하고 비겁한 감정이 아니다

-틱낫한스님-

이해와 연민은 우리에게서 매우 강력한 에너지를 생성시킨다.

이해와 연민은 각각 우매와 냉정의 반대어다.

이해와 연민을 수동적이고 나약하고 비겁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해와 연민이란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모르는 소치일 뿐이다.

연민의 정을 가진 사람은 불의를 보고도 저항하지 않고 항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들은 수많은 승리를 거둔 전사들이고 영웅들이다.

연민과 비폭력으로 행동할 때, 나와 남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행동할 때, 우리는 매우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화로 비롯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고, 그리하여 남을 비난하거나 응징하지 않을 수 있다.

연민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지속적으로 커져가는 감정이고, 그러므로 불의에 맞서 싸울 때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마하트마 간디가 바로 그러한 분이었다.

그분은 폭탄이나 총을 가진 적이 없었고 정당을 가진 적도 없었다.

그분은 단지 나와 남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통찰과 강한 연민을 바탕으로 행동했을 뿐, 결코 화로 비롯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인간을 우리의 적이 아니다.

우리의 적은 타인들이 아니다.

우리의 적은 우리와 타인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폭력과 무지와 불의다.

연민과 이해로 무장하고 있을 때 우리는 타인들과 싸우지 않고, 다만 남을 침략하고 지배하고 착취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속성과 맞서 싸울 수 있다.

우리는 타인들을 죽이고자 원하지 않고, 다만 어떤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우리는 어리석지 않다.

우리는 매우 이지적이고, 통찰력을 갖고 있다.

연민의 정을 가지면 타인들이 그들 자신과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게 된다.

연민의 정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지적인 인간이 된다는 의미다.

사랑에서 비롯되는 비폭력적인 행동만이 이지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

연민의 정을 갖는다는 것은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게 하고 상식을 망각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보행 명상을 하는 한 집단을 인솔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천천히 느긋하게 걷는다.

보행 명상은 강한 에너지를 생성시키는 수련이다.

그것은 우리를 고요와 견고와 평화로 감싸안는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린다고 치자.

인솔자는 그들은 계속 천천히 걷게 해서 온몸이 흠뻑 젖게 할 것인가? 그건 이지적인 행동이 아니다.

훌륭한 보행 명상 인솔자라면 당장 보행을 조깅으로 바꿀 것이다.

그러면서도 보행 명상의 기쁨이 그대로 유지되게 할 것이다.

사람들을 비에 흠뻑 젖지 않게 하고서도 얼마든지 수련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지적인 방식으로 수련을 해야 한다.

명상은 수동적인 행동이 아니다.

명상은 단지 남들이 하는 대로 불문곡직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기술을 가져야 하고, 자신의 이지력을 충분히 이용해야 한다.

남을 친절하게 대한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행동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연민의 정을 갖는다는 것은 타인들이 나를 짓밟거나 나를 파괴하는 행위를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는 한편, 타인을 보호해야 한다.

위험한 사람을 격리시킬 필요가 있을 때는 당연히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항상 연민의 정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람이 계속 파괴적인 행동을 하며 자신의 화를 키워 가는 것을 막아주려는 동기를 가지고 그를 격리시키도록 해야 한다.

연민의 정을 갖기 위해서는 비단 승려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경찰관도 그 감정을 가질 수 있다.

판사나 교도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경찰관이나 판사나 교도관은 관세음보살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위대한 연민의 정을 품은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들은 매우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늘 연민의 정이 마음속에 살아 있게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의식적인 사람을 실천하면 우리는 연민의 정으로 경찰관들을 도울 수 있다.

오늘날의 경찰관들은 공포와 분노와 긴장으로 가득찬 삶을 산다.

공격을 당하는 경우가 너무도 잦기 때문이다.

경찰관을 증오하고 모독하는 사람들은 경찰관의 직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아침에 제복을 차려입고 권총을 허리에 찰 때, 경찰관들은 그 날 저녁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자신하지 못한다.

그들은 엄청난 고난 속에서 일을 한다.

그들의 가족 또한 엄청난 고통을 당한다.

경찰관들은 사람을 구타하는 행위를 즐기는 게 아니다.

즐거운 기분으로 총을 쏘는 게 아니다.

단지 그들은 마음속에 있는 공포와 고통과 폭력의 장벽을 처리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그들도 사회의 희생자가 될 가 능성을 안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경찰의 책임자는, 그 휘하에 있는 경찰관들의 심정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늘 마음속에 연민과 이해가 살아 있도록 자신을 다독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아침저녁마다 거기로 나가서 도시의 평화를 힘들게 지키고 있는 여러 경찰관들을 돕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경찰을 ‘평화 유지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시민들의 마음속에 평화가 없다면 그들이 지킬 평화란 게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여기서 평화란 공포로부터의 해방과 이지와 통찰을 의미한다.

경찰관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많은 기술을 익혀야 하지만, 자기 방어만을 위한 기술로는 직무를 다할 수 없다.

그들은 자기 방어 기술을 익히는 한편, 이지력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공포에서 비롯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공포에 사로잡히면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러면 총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리하여 무고한 사람을 해치게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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