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의 원(願)은 자리이타(自利利他)
-보성스님-
요즈음 우리나라에도 토요일 휴무제도가 생겨 노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휴식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노는 날이 많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휴식을 취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잊고 일 속에 빠졌다가 자기를 돌아보는 휴식을 취한다면 그것 이상으로 바람직한 것은 없습니다.
일을 놓고 자기를 돌아보고, 자연 속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자기를 돌아보면 그 휴식은 반드시 큰 충전의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참으로 묘한 쪽으로 흘러갑니다.
편한 쪽으로, 더 가지는 쪽으로 자기를 자꾸자꾸 몰아갑니다.
인도의 한 산 속에 꾀꼬리와 공작과 호랑이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목소리가 아름다운 꾀꼬리가 노래를 부르자, 화려한 옷을 입은 공작이 말했습니다.
“꾀꼬리야, 어쪄면 그렇게 아름다운 노래 소리를 낼 수가 있니?” “이러한 소리를 갖기 위해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거예요.
지금도 저는 제 목소리를 다듬고자 끊임없이 발성연습을 한답니다.
그런데 공작님은 제 목소리보다 더 관심을 끄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잖아요?” “화려한 옷? 하지만 나의 목소리는 형편없는 걸.
꾀꼬리야, 네 목소리를 나에게 빌려줄 수는 없겠니? 나의 외모에 너의 목소리까지 갖춘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안돼요.
나의 목소리를 빌려주고 나면 누가 나에게 관심을 갖겠어요?” 그때 산 속의 왕인 호랑이가 말했습니다.
“그까짓 목소리나 화려한 옷으로 무엇을 하려고? 나는 코뿔소와 같은 뿔이나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
뿔만 하나 더 있으면 맹수의 왕들 중에서도 최고가 될텐데…” 꾀꼬리의 목소리를 빌렸으면 하는 공작과 뿔을 갖기를 원하는 호랑이!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욕심입니다.
탐욕입니다.
공작의 활짝 펼쳐진 날개면 얼마든지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고, 뿔이 없어도 호랑이는 산 중의 왕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깥을 향해 더 좋고 멋진 것을 찾고자 합니다.
꾀꼬리처럼 자기 목소리를 다듬고자 노력 하지는 않고…
우리는 꾀꼬리의 목소리를 원하는 공작이나 뿔을 바라는 호랑이처럼 쉬어서는 안 됩니다.
쉬면서 헛된 욕망을 키워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휴식을 취할 때는 욕심부터 쉬어야 합니다.
바깥쪽으로 향해 좇아가던 평소의 관심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욕심을 비우고 바깥에 대한 헛된 생각들을 쉬면서 나를 돌아볼 때 참된 휴식이 이루어지고 그와 같은 참된 휴식이 있으면 우리가 하는 평소의 노력들이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 나는 매스컴을 통하여 또 많은 사람들로부터 ‘살기가 어렵다’ 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과연 살기가 어려운 것입니까? 30년, 40년 전을 생각하면 살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감히 할 수 없습니다.
지금 50대, 60대의 사람들만 하여도 ‘보릿고개’를 경험한 분들이 참으로 많지 않습니까? 1951년에 나는 효봉 노스님을 모시고 통영 미륵사의 도솔암에 있었습니다.
그때 통영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스님, 거제도에는 먹을 것이 참으로 없습니다.
그래서 거제 사람들이 통영으로 먹을 것을 얻으러 오는데, 간신히 배를 타고 건너와 한 쪽 발을 통영 땅에 딛고는 나머지 한 쪽 발을 육지로 끌어올리 힘이 없어 다시 배로 굴러 떨어져 죽기도 한답니다.” 참으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기까지 했던 50년대.
보리밥이라도 감사히 생각하며 먹었던 60년대를 생각하면 지금이 결코 살기 어려운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의 ‘살기 어려움’은 기아나 경제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나를 살필 줄 몰라서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은 욕심대로 충족시키고, 남과 어울려서 남들에게 지지 않고 살려 하니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이럴때일수록 우리는 ‘나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 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살필줄 아는 사람’ 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돌아볼 줄 알고 나를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되면 다가오는 어려움을 쉽게 극복할 수 있으며 참으로 잘 살 수가 있습니다.
나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 대부분의 불자들은 초하루나 보름, 여러 재일에 절을 찾습니다.
절을 찾고 부처님을 찾는 그들에게는 분명 원(願)이 있습니다.
마음 속에 원을 품고 부처님을 찾아옵니다.
집안 잘 되기, 대학 합격, 병고 소멸 등등…..
그러나 나를 돌아보고 나를 살피는 원을 바치는 사람은 참으로 드뭅니다.
“부처님이시여, 나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나를 살필 줄 알고 살펴 가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과연 몇 사람이나 이러한 원을 부처님께 바치고 있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나! 나!”를 외치며 살고 있습니다.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가 아무리 좋다한들 ‘나’와 바꿀 바보는 없습니다.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 앞에는 ‘나’가 붙습니다.
‘나’의 남편,아내요 ‘나’의 자식이요 ‘나’의 재물이요 ‘나’의 명예입니다.
‘나’보다 더 앞서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나’를 올바로 돌아보고 올바로 살필 때 내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이 살아납니다.
남편,아내도, 자식도 재물도 명예도 일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을 발할 때는 반드시 ‘나를 올바로 돌아보고 올바로 살피겠다’는 맹세부터 부처님께 바쳐야 합니다.
다음으로 세워야 할 원은 남들과 더불어 살겠다는 서원입니다.
“가족과 이웃에게 행복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상의 두 가지 원을 합하면 대승불교의 핵심인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원이 됩니다.
보살의 원이 됩니다.
우리는 ‘나를 살피면서 남을 이롭게 해주겠다’는 보살의 원 속에서 살아가는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참된 불자가 되어 참된 향상의 길로 나아가고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리이타의 원 속에서 언제나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 “나는 지금 어떠한 곳에 몸을 담고 있는가?” 이제 그 자리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서 나를 살피고 주위를 살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만 살면 종착역은 끝없는 행복의 부처님 땅입니다.
반대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옆사람의 눈에 맞추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나의 힘으로 나의 정신으로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허둥지둥 남따라 사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은 ‘나’를 저버리고 허수아비처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나를 살피기보다는 남 따라 살게 되면 중심을 잃어 허둥지둥 살게 되고, 허둥지둥 살면 들떠있게 됩니다.
들떠 있으니 걸음을 걷더라도 발바닥이 땅에 닿는 줄을 모릅니다.
발바닥이 어느 땅에 닿는 줄을 모르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쌍하고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얼마 전에 틱낫한 스님이 한국에 와서 여러 날을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 법문을 하였는데, 그 골자는 호흡입니다.
“들이쉬고 내쉬는 들숨 날숨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단단하기는 저 태산과 같이 하고 든든하기는 땅과 같이 하라.” 틱낫한 스님은 ‘숨 잘 쉬는 사람이 될 것’을 설하고 떠났습니다.
숨쉬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 쉬는 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명상을 하거나 좌선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호흡을 느낍니다.
누구든지 마찬가지입니다.
허둥지둥 허겁지겁 살다보면 숨쉬는 것을 잊게 됩니다.
그러나 허겁거리는 생각을 쉬게 되면 편안하게 숨을 들이키고 내 쉴 수 있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숨이 헐떡거리다 보니 편안한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돈 찾아 출세 찾아 명예 찾아 멋 찾아 맛있는 것 찾아 헐떡거리는 우리네 인생! 이것들을 얻으면 참으로 행복해집니까? 아닙니다.
경험해 본 사람은 이것을 행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도 ‘돈 잘 벌어 잘 입고 잘 먹어야 행복해진다’는 법문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감히 부탁드리오니 내가 나를 돌아보고 내가 나를 살피는 불자가 되십시오.
그래야만 행복이 제자리를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