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번뇌이자 부처임을 깨달으라
-지광스님-
내 안에 항상 싸움이 있다.
‘진짜 나’와 ‘가짜 나’의 싸움이다.
진짜 나는 부처님의 나요, 가짜 나는 ‘번뇌의 나’ ‘악마의 나’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내 안에 있고 천사와 악마의 싸움이 항상 나를 괴롭힌다.
우리는 대체로 ‘악마의 나’에 지는 예가 다반사다.
우리가 법을 연마하고 기도 정진해야만 하는 이유는 부처님의 나를 강화시키기 위해서다.
부처님도 깨달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악마와 싸우셨다.
많이 싸우고 많이 지고 실패하면 할수록 능력이 커지기는 하지만 참으로 중생의 삶은 고통스럽고 힘겹다.
항상 우리는 잘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을 자주 한다.
잘나가다 옆길로 빠지는 ‘나’ 변덕을 부리는 ‘나’는 항상 ‘악마의 나’, ‘물질적인 나’다.
‘악마의 나’, ‘가짜 나’는 항상 두려움과 불만의 원천이다.
혜가 스님이 달마 스님에게 물었다.
“제가 마음이 불안합니다.
모쪼록 불안을 걷어가 주소서.
마음을 평안케 해주소서.”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라.
그러면 평안케 해 주겠다.”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는 혜가 스님에게 달마 스님은 “불가득(不可得)의 그대 마음은 이미 평안케 되었다”고 하였다.
우리는 참 나로부터 소외됐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로 전락해있는 것이다.
본래 하나인데 이뭣꼬 ‘묻는 나’와 ‘물어지는 나’ 즉, 물음의 주체와 물음의 대상으로 갈라지는 분별 때문에 ‘참 나’로부터 갈라져있는 것이다.
남전보원선사가 법을 묻는 납자에게 “그대가 그대 자신을 향하려 한다면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한 도리나 임제 스님이 “만일 그대가 그 놈을 찾는다면 그 놈은 더욱 더 멀리 달아난다.
만일 그대가 그 놈을 찾지 않는다면 그 놈은 네 눈앞에 나타난다.
그때 그의 놀라운 소리가 머릿속을 맴돌 것이다”라고 한 가르침이 모두 ‘참 나’를 가르치신 내용들이다.
현실의 나, 가짜 나를 생각하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 가짜 나가 사라지면 객관적 세계, 현실세계가 사라지기에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현실세계의 나와 남과의 분별은 무아를 깨달음으로써 극복된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에 나와 너를 대입해보면 나는 내가 아니고 너는 네가 아니다.
내가 너일 수 있고 네가 나일 수 있다.
여기서 나와 남의 분별이 깨지기에 무아의 세계, 참 자기의 세계, 불가득(不可得)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불가득의 세계는 내가 너이고, 네가 나 일수 있기에 나는 정말 참 나이고, 너도 정말 참 너일 수 있는 것이다.
방황으로부터 해방이요, 무집착의 해탈계가 되는 것이다.
나와 너 사이에 장애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이들은 참 자기가 무아성을 가지고 있기에 완전한 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참 자기가 이렇듯 공하며 비존재이기에 산은 산으로써 물은 물로써 긍정되는 것이다.
“불법의 대의가 무엇입니까”란 질문에 임제가 할을 외치고 덕산이 방을 치는 것이 모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참 자기와 연결 돼 있기 때문인 것이다.
바르게 말해도 30방 틀리게 말해도 30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주장자라 부른다해도 진리와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만일 이것을 주장자라 부르지 않는다해도 진리에 반하게 된다.
자! 이를 무엇이라 부를 테냐? 말해 보라 말해 보라.” 수산 스님의 일갈 역시 같은 맥락이다.
참 자기의 단계에 오르려면 진정 이 같은 비약이 필수적이고 커다란 부정을 겪어야 한다.
또한 삶과 죽음을 돌파하는 커다란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한다.
대사일번(大死一番)이면 대불현성(大佛現成)인 것이다.
참 자기로의 철저한 회귀는 커다란 죽음 없이 일어나지 않으며 내 안의 커다란 싸움은 종식되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은 자는 대지혜와 대자비와 하나이고 위대한 가피와 하나이다.
그에게는 번뇌가 부처이고 부처가 번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