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스님─괴롭기에 고통스럽기에 가치가 있다(1)

괴롭기에 고통스럽기에 가치가 있다 능인선원 주지

지광스님

(스트레스 많이 쌓이는 분 읽어보세요)

1.

어려움이 많을수록 중요한 일들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간단한 일들은 그렇게 장애물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렵고 비중이 큰 일일수록 장애물이 많습니다.

비중이 별로 크지 않은 일들은 누구나가 다 손쉽게 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중첩되고 해결해내기 어려운 일들은 고도의 영향을 필요로 하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세속에서도 결재한다고 하는데 결재권이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결재권이 커집니다.

과장이 내릴 수 있는 결정권, 국장이 내릴 수 있는 결정권, 장관이 내릴 수 있는 결정권.

또 대통령이 내릴 수 결정권……

그러니까 대통령을 뽑을 때는 모든 국민이 다 함께 선거를 해서 뽑습니다.

즉 그 일이 진행되어 나가는데 있어서 가로막는 장애물의 숫자가 많을수록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물을 걷어낼 수 있는 역량이 아주 중요합니다.

리더가 된다거나 지도자가 되는 사람들은 고도의 공부와 또 그것뿐만이 아니라 지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만난을 헤쳐온 노련한, ‘준비된 존재’가 아니어서는 참으로 곤란한 일이 벌어지게 마련입니다.

만난을 딛고 일어난 사람들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던 간에 그 일을 잘 극복해 낼 수 있는 역량을 비축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결정코 탁월한 일을 해 내기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스트레스와 갈등의 연속입니다.

뭔가 문제를 풀기 위해서 항상 애를 먹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평상시에 지적으로 정신적으로 투자를 많이 해야만 됩니다.

흔히 “미래는 준비한 자의 것이다.” 이렇게 얘기들을 합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평상심시 도(平常心是道)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하는 얘기들은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 중차대한 잠언(箴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매일매일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은 개인적인 역량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놀러온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도 ‘태어나는 것은 고통의 태어남이요,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고통과 더불어 사는 것이요, 이 세상을 스러져 간다는 것은 고통이 스러져 가는 것이다.’ 이렇게 인생을 다 고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천재를 연구한 학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대체로 천재들은 몰두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몰두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어떻습니까? ‘삼매(三昧)’라고 할까요? ‘무아경(無我境 )’이라고 할까요? 영감(靈感)에 어린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집중(集中)’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자기를 내던지는 몰입의 경지,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라고 말합니다.

탁월한 이데아(idea )를 끌어내려고 한다면 대체로 자기를 던져버리는 존재들입니다.

예술가들은 대체로 그러한 스타일의 삶을 산 사람들이 많습니다.

2.

어떻게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을까 우리는 삶을 살면서 스트레스를 잘 극복할 수 있는 해소 방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매일매일의 삶을 살면서 어떠한 형태건 간에 고통이 아닌 것이 있습니까? 모두 고통스러운 것들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늘 우리를 괴롭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골머리를 막 썩히면서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가운데서 극복의 의지도 강화되는 게 사실이니까요.

여러 가지 스트레스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모색을 하는 동안에 사람의 능력이 승화됩니다.

인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가정’입니다.

그 다음에 아이들의 경우에는 ‘학교’이고 남자들의 경우에는 ‘직장’입니다.

그런데 가정이라거나 직장이라거나 학교가 다 스트레스의 굴레들입니다.

가정에 스트레스가 없습니까? 학교는 스트레스가 없습니까? 또 직장은 스트레스가 없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스스로 스트레스 해소책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스트레스에 희생되어 버리고 맙니다.

삼성병원에 근무하는 후배가 와서 말을 하는데 90%가 암환자라고 합니다.

정말 여러분들도 조심하시고 살아야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암이라거나 다른 병마에 희생당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면 가정 내에서, 학교에서, 또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살 수 있을까요? 자살자의 폭발적인 증가 같은 것도 스트레스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스트레스를 이기며 살 수 있을까요? 이게 문젯거리입니다.

사람은 약한 존재입니다.

스트레스에 쓰러져 버리고 술을 마시고……이렇게 부정적인 상황을 자꾸만 연출하게 됩니다.

더욱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상대방을 보는 안목입니다.

“저 사람은 비정상 같애.”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사람들이 상대방을 볼 때 즉 상대방을 평가하는 데도 정신적인 문제가 있으니까요.

몸의 병도 몸의 병이지만 요즘엔 마음의 병이 너무 심각합니다.

정신병원들이 아주 미어터질 정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정신질환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상대방을 바라볼 때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너무 많고 또 상대방도 나를 비정상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모두가 자기라고 하는 테두리, 즉 자아 중심적으로 살다가 보니까 남들이 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갈등이 오는 것이지요.

상대방을 잘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관용(寬容)’이라거나 ‘아량(雅量)’이라거나 ‘포용(包容)’이라거나 이런 말들을 너무나 상투적인 말로 생각합니다.

현대 생활이 여러 가지로 문제 요소가 많긴 하지만 ‘인간의 마음 속의 질병’.

‘마음의 갈등’ 이런 것들이 참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통계에 보면 전체 인구 중에서 중증 정신병적인 성격이상자, 정신박약자에 해당되는 사람이 6% 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중증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보다 조금 낮은 것, 즉 자질 부적격자로 평가되는 사람이 6.4%.

다시 말하면 전체 인구 중에서 정신병이라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12% 가량 됩니다.

그런데 이제는 보편적인 사람들도 뭔가 정신병적인 내용들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사는 게 정말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서로 만나는 것도, 생명이 등장하는 과정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힘든 과정을 뚫고 나왔습니까? 삼 억 마리가 들어가서 한 마리만 남고 다 죽어 버리니까 태어나는 과정 자체도 무지막지한 경쟁입니다.

살인적인 경쟁입니다.

태어나는 것은 고통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 몸 받기가 그렇게 힘들다고 합니다.

허공에는 사람 몸을 받으려고 대기 중인 영혼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성불을 하게 되면 싸운다는 생각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사랑과 자비(慈悲)’, 그러니까 부처님이 되기 전까지는 계속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즉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경쟁심 속에서 살고 또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적대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심지어는 가정 내에서도 말입니다.

아버지를 둘러싸고 어머니하고 딸하고 경쟁한다고 합니다.

서로 아버지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또 어머니를 차지하기 위해서 남편하고 아들하고 경쟁을 한다고 합니다.

부처님 말씀도 똑같은 거니까 충분히 가능한 얘기입니다.

한 명은 전생의 애인이고 또 한 명은 금생의 애인이니까요.

우리가 사는 삶의 양태(樣態)가 갈등 구조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삶을 도모하시면서 갈등의 해소 방안들을 꼭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스트레스 해소법을 터득하셔야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고통스럽고 마음이 불안해질 때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관세음보살 하라’고 얘기를 하시기도 하셨고……

‘관세음보살 하라.’ 그렇습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남과 비교하려고 하지 말아라.’ ‘나의 길을 가라.’ 갖가지 불안감으로부터의 해방, 스트레스로부터 나를 구제할 수 있는 묘방을 어떻게 하면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이렇게 법당에 나오시고 그러지 않습니까? 마음 가운데는 해소되지 않은 응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응어리를 풀어야 됩니다.

안 풀면 병이 되니까요.

마음의 덩어리는 몸의 덩어리로 나타납니다.

요즘에 암이 많다는 건 마음에 쌓인 게 많다는 것입니다.

이게 다 스트레스가 변질된 것이지요.

‘색즉시공(色卽是空 )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신문을 보면 범죄도 ‘횡령(橫領)’이라거나 ‘착복(着服)’이라거나 ‘배임(背任)’이라거나 여러 가지가 많습니다.

마음 가운데 계속해서 뭔가 쌓이고 있습니다.

‘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이 돈은 먹으면 안 되는데.’ ‘이런 건 받으면 안 되는데.’ 이런 걸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 속에는 너무나 많은 응어리가 쌓이고 있습니다.

그걸 풀어야 합니다.

3.

매를 아끼는 부모는 유태인의 부모가 아니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매를 맞습니다.

매를 맞고 죄가 탕감되면 비교적 마음이 맑아집니다.

매라는 게 참 약은 약입니다.

유태인의 『탈무드』에 보면 ‘매를 아끼는 부모는 유태인의 부모가 아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학교에서 매를 치다 걸리면 어떻게 됩니까? 선생님이 쫓겨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매를 많이 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죄가 뭔지 선이 뭔지 악이 뭔지 모르게 됩니다.

아이들 중에도 그늘진 아이들이 있고 어른들 가운데도 그늘진 사람들이 있는데 얘기하다가 보면 모두 가정 내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건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이 그늘지다는 것은 그만큼 쌓인 것이 많고 마음의 단면이 밖으로 빛을 발하지 못하니까 그늘지고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우울증’이라는 병도 달리 생긴 병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매라도 쳐주면 “엄마 잘못했어요.” 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리고 매를 맞기 전까지는 마음이 답답했지만 매를 맞으면 어린아이의 스트레스가 풀어집니다.

‘아! 이제 매를 맞아서 끝났다.’ 이거지요.

그러고 나면 마음이 평화롭고 즐겁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사랑’입니다.

사랑은 관심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에 보면 “사랑이 뭐니?” “사랑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란다.” 하는 대화가 나옵니다.

사랑이란 관심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고 예리한 눈으로 아이를 관찰하고 매를 쳐주고 하면 아이들이 반듯하게 큽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머니나 아버지나 선생님이 매를 쳐 줄 수 있지만 어른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매를 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나에게 시비를 걸면 당장 싸워 버립니다.

심지어는 남편이 뭐라고 그러면 마누라가 가만히 있습니까? 밥도 안 해주고 빨래도 안 해 주지요.

(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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