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스님─고통은 나를 단련시키는 묘약

고통은 나를 단련시키는 묘약 -능인선원 지광스님 – 탁월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처절한 실패를 통해 크나 큰 교훈을 얻었다고 말한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하듯 참담한 실패를 통해 위대한 지혜를 얻게 된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가고도 남음이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굴리는 어떤 인물이 과거 수억 달러를 날리고 리스크(risk) 관리기법을 연구개발한 끝에 가장 탁월한 자금운용가가 되었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정말 처절하게 실패해보지 않는 자들은 뼈저린 반성과 참회를 해볼 기회가 없다.

대부분의 엄청난 인물들은 많이 깨져본 위인들이다.

위대한 창조주들은 둘째치더라도 우리가 잘 아는 링컨, 에디슨, 등소평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이 처절한 고통 속에서 단련된 인간들이다.

왜 처절한 고통이 그들을 엄청난 존재로 승화시키는가? 그 같이 엄청난 체험을 해보지 않은 자들은 모른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많이 깨지고 또 깨져야 참된 본질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시공의 세계를 사는 중생들이 시공을 초월하는 부처님의 세계를 체험하려면 시공속의 자기를 부숴야 한다.

자기를 처절히 깨뜨리지 않고 부처가 될 수 없고 부처의 지혜가 나올 수 없다.

깨지고 깨질수록 겸손해지고 결국 무아가 된다.

참선도 기도도 모두가 하나같이 자기를 깨부수는 작업이 아니던가? 많이 깨져야 본질이 드러난다.

깨지면 깨질수록 부처와 가까워지는 도리를 아는가? 깨지고 또 깨져야 사랑의 화신이 되고 자비의 화신이 된다.

깨지면 깨질수록 더욱 더 강렬히 부처를 느끼게 되는 도리가 있다.

고통 중에 부처를, 하늘을 찾게 되지 않던가.

왜 새벽기도가 의미를 갖는가? 왜 백일기도, 천일기도가 의미가 있는가? 왜 몸과 마음을 던지는 참선이 의미가 있는가? 나를 던지면 던질수록, 깨지면 깨질수록 더욱 더 부처님 세계의 아름다움에 취하게 된다.

깨지면 깨질수록 더욱 더 교만심이 녹아지고 부처가 된다.

참다운 아름다움은 진실로 나를 부술 때 나를 깨뜨릴 때 얻어진다.

마음을 갈고 닦으면 아름다워진다 하고, 정진하면 정진할수록 아름다워진다 한다.

모두가 자신을 깨뜨리는 데서 오는 아름다움이요, 결국 부처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처절히 기도해 보았는가? 기도를 하면 할수록 참선을 하면 할수록 왜 부처님을 강렬히 느끼는가?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장벽이 두터울수록 어두워진다.

더러워진다.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 그래서 무명 중생들이 아닌가? 끝없이 자기를 깨라.

자기를 부숴라.

깨고 또 깨고 끝없이 깨나가다가 보면 결국 더 이상 깨뜨릴 수 없는 자리를 만나게 되리라.

깨지지 않는 즐거움, 더 이상 깰 수 없는 그 자리까지 가야한다.

불교를 해탈의 종교라 하고 해탈지견의 종교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행의 길은 결국 해탈의 길이고, 나를 부수는 길이다.

더 이상 깰 수 없는 자리에 도달하면 시공을 뛰어넘는 존재가 된다.

진리와 하나 되고 법과 하나 되고 무량, 무한, 영원의 존재가 된다.

항상 어느 곳에, 어떤 상황에 있던 나를 깨뜨리는 존재가 되라.

항상 깨지는 존재가 되라.

모두를 다 깨뜨리지 않으면 우리에게 영원한 해탈 열반은 없다.

고통의 끝이 나지 않는다.

깨지고 또 깨지면, 깨고 또 깨면 빛이 된다.

우주를 비치는 거룩한 빛이 된다.

사랑이 된다.

자비가 된다.

깨지고 또 깨지고, 깨고 또 깨면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열반이 된다고 부처님은 가르치지 않으셨던가? 모자라기에 타율적으로도 깨지고 자율적으로도 깨져라.

남의 모욕과 천대 질시를 웃으며 넘기라.

끝없이 끊임없이 참회하라.

기도하라.

고통은 모두가 깨지는 과정이다.

고통을 고통이라 부르지 말라.

한없이 깨져야만 부처의 맛을 알리라.

온갖 영가들도 모두 자신을 깨지 못해 괴로워하는 존재들이다.

한없이 깨져야 한없는 진보가 있고 한없는 부처님의 가피 속에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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