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장스님─텅 빈 마음이 진실한 해제

텅 빈 마음이 진실한 해제

법장스님

(전 조계종 총무원장) 결제심출結制心出요

해제신출解制身出라.

해결무려解結無慮하면

시진출가是眞出家라.

결제는 몸이 출가함이요

해제는 마음이 출가함이라.

해제결제는 생각하지 않으며

이것이 진짜출가라.

안녕들 하셨어요? 날씨가 몹시 춥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들께서 세수하면서 코만지는 것처럼 쉬운 법문을 해 드릴까 합니다.

그런데 모르는 분은 저 하늘에서 바늘을 떨어뜨려 겨자씨 맞추는 것만큼 어렵게 들릴 것인데,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는냐? 똑같이 들었는데, 똑같은 법사가 얘기를 하는데 왜 그런 차이가 있느냐 하면 여러분들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법문을 할 때는 선해상이나 경박상을 내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저 스님이 하는 법문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이렇게 어렵게 생각하지도 말고, ‘저 스님이 하는 법문은 스님들마다 들어본 소리야.’ 하는 그렇게 가볍게 여기지도 말고.

그 뜻은 소리는 들었을지언정 그 내면에 있는 참을 우리가 깨우쳐야 하는데, 그것 때문에 매일 매일 법문도 들어야 되고 기도해야 하고 염불도 해야 하고, 정진도 해야 되고, 또한 결제를 했기 때문에 오늘 해제도 해야 하고, 입재를 했기 때문에 회향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매년 두번씩 사월 보름 입재해서 칠월 보름 회향을 하고, 시월 보름 결제와 기도 입재를 해서 정월 보름 해제와 회향을 합니다.

그런데, 결제와 해제라는 것은, 기도 입재와 회향이라는 것은 결코 어느 한 장소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여자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남자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범부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성인에게 있는 것도 아니요, 좋은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궂은 곳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곳곳마다가 결제처요, 기도처인 것입니다.

그것은 일찍이 부처님께서 가르쳐서 이미 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진실한 결제를 했다고 할 수가 있고, 진실한 기도 입재를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여러분들이 정말로 기도회향하는 것처럼 정월보름을 맞이해서 어떤 것이 진실한 회향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오늘 기도회향하셨죠? 여러분 근심 걱정 다 풀어 버리셨죠? 그래야 회향입니다.

걸림이 없어야 회향입니다.

자유스러워야 회향입니다.

여러분들이 더 이상 바라고 원하는 것이 없어야만 회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아직도 기도 입재입니다.

아직도 결제 중입니다.

바로 결제나 입재나 회향은 시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날짜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조금 전에 읊은 게송처럼,

어떤 것이 결제냐? 몸이 출가한 것이 결제입니다.

어떤 것이 해제냐? 마음이 출가한 것이 해제입니다.

그럼 진실한 해제와 결제가 무엇이냐? 마음과 몸이 하나인데, 어찌 마음과 몸을 분리하느냐?

해제와 결제라는 생각을 내지 않을 때 비로소 진실한 해제요 진실한 결제요 진실한 회향입니다.

이 이치를 여러분들이 오늘 비록 알아차렸다고 하면 진실한 회향을 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진실한 선각자나 선학자들의 결제와 해제는 어떤 것이냐? 옛 조사가 말씀하시기를 “귀신 방구에 털이 나서 저 허공에 있는 뼈다귀를 둘둘 감아서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때 만이 결제를 했다고, 해제 했다고 얘기할 것이다.

도대체 귀신은 무엇이냐, 귀신은 눈으로 볼 수도 없는데.

그런데 또 귀신 방구는 무엇이냐.

소리가 있을 뿐이지 모양이 없다.

그런데 귀신 방귀에 털이 나서 그 털로서 뼈다귀를 둘둘 감아서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때만이 그렇게 할 줄 알아야만 과연 여러분들이 해제를 했다고 얘기하고, 기도회향을 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이 이치를 여러분들이 잘 아셔야 합니다.

산에 있는 초목 모든 마디마디가 전부다 부처이고, 또 마음도 부처인데 도대체 어떤 것을 부처라고 하느냐?

여러분들, 조계사에 여기 모셔둔 저 부처님 전에 여러분들 공양올리고 기도 열심히 하셨죠?

쇠붙이로 만든 부처는 용광로를 건너갈 수 없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을 건너가지 못하고, 흙으로 빚은 부처는 물을 건너가지 못 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부처냐?

여러 형상에 매달리지 말고, 진실한 부처님께 귀의할 줄 알고, 진실한 부처님께 공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실한 신심이 없이는 진실한 부처도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황면노자라는 것이 어떤 이냐? 부처님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것을 부처님이라고 하느냐? 그런데 여러분들 오늘 회향하면서 이치를 안다고 하면 자기가 세수하는 코를 만지는 것만큼 쉽습니다.

아주 쉬워요.

바로 그 이치를 여러분들이 알아야만 됩니다.

이런 이치를 안다고 하면 여러분들이 참으로 결제를 했다고, 오늘 정말 온전히 해제를 했다고 여러분들이 10월 보름 기도 입재를 해서 오늘 바로 정월 보름 회향을 했다고 가가소소 웃으며 정말로 걸림없이 정말로 신바람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림이 있고, 원망이 있고, 욕심이 남은 것이 있다면 아직도 결제를 못했고, 결제를 못했기 때문에 해제도 못했고, 기도 입재도 못했고, 기도회향도 되지 않는 어림없는 짓입니다.

즉 형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의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형식과 의식이라는 것이 어떻게 다르냐? 여러분, 결혼과 결혼식을 아시죠? 결혼은 뭡니까? 결혼은 남녀가 만나서 살아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꼭 식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식을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200쌍 넘게 주례를 섰습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던데, 요즘은 정말로 의식이 이상하게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예식에 가면 면사포를 쓰고 들어옵니다.

면사포를 어떻게 쓰고 들어옵니까? 전에 보니까 가리고 들어왔는데, 요즘은 거의 넘기고 들어옵니다.

넘기고 들어온 사람을 보고 뭐라고 그러느냐면 이미 결혼식을 마쳤구나? 면사포를 쓰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면 결혼과 예식을 함께 하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니까? 예식은 법다워야 합니다.

신랑신부가 맞절을 합니다.

맞절이란 처음 만나는 인사입니다.

그때 맞절을 할 때 신랑이 신부의 면사포를 뒤로 젖혀줍니다.

처음 만나는 인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식 때 뒤고 제치고 들어온 사람은 이미 만나고 들어온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결제와 해제, 기도 입재니 회향이 식에만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이 뭐냐? 예를 들어서 결혼과 함께 식을 올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회향을 하네, 입재를 하네 할 때 여러분들이 진실한 마음이 가득 찰 때만이 여러분들 당당하게 결제와 해제를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해탈을 했다고 얘기할 수 있고, 또한 여러분들 자유를 얻었다고 할 수 있고, 그때 비로소 회향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은 스스로 푸릅니다.

누가 푸르라고 해서 푸른 것이 아닙니다.

물 또한 스스로 흘러갑니다.

이러한 것들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은 흘러가게끔, 산을 푸르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욕심이 많아서, 이루어지고, 부스러지고, 원망하고, 즐거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지옥을 만들고 극락을 만들고 하는 것은 사람 스스로 욕심에 따라서 만들어 집니다.

만약에 그런 생각을 확 바꿀 수 있다면, 여러분이 바꾸어 버리면 여러분들은 그때서부터는 자유스럽게 살 것인데 욕심이 많아서 인상 쓰고 살면 무엇하겠습니까?

여기서 제가 조주스님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옛날 조주스님께서 당신 제자들이 보림을 한다고 암자에 있는데, 제자들이 공부를 얼마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제자들을 찾아 갔습니다.

제자가 있는 토굴을 찾아가 “암주 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 암주가 스승이 온줄 알면서도 반가이 맞이하지 않고, 문으로 주먹을 확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조주 스님께서 휙 돌아서면서 말하기를 “약해서 못쓰겠군.”하셨습니다.

또 한 제자한테 가서 똑같이 “암주 있는가?” 그 제자 역시 먼저 제자와 똑같이 인사를 하지 않고, 문 밖으로 주먹을 확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조주 스님께서 ‘능살능활이로구나!?능히 살리기도 하고, 능히 죽이기도 하는구나.

조주스님이 잘못된 것인지, 제자들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주먹 내미는 데 다른 이치가 있는가? 이 소식을 알아야 합니다.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이 쌀을 놓고, 같이 돈을 놓고 기도를 한다손치더라도, 어떤 사람은 진실로 기도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쌀과 돈으로 기도를 한 것입니다.

눈 뜬 사람만이 알고, 혜안이 열린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엔 세 가지 중요한 이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주스님께서 제자들에게 달리 말씀하셨는데, 그 제자들의 공부를 능히 저울로 달아보았느냐, 자로 재서 인정을 했느냐 하는 하나의 요긴한 이치가 있습니다.

아니면 두번째로 조주스님께서 오히려 제자들이 공부를 얼마만큼 했는지 점검하러 가서 두 제자에게 당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조주스님이 두 제자의 공부를 능히 간파하고서도 너희들은 아직 식은 있으되, 행에는 이르지 못했구나 하는 이치가 있는 것인지, 이것은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에서 한 생각 돌리고 나면 어떤 것이 맞고 어떤 것이 틀린 것이냐 여러분들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텅 빈 마음을 일러 회향이라고 하고, 해제라고 합니다.

일체 생각을 헌 신짝처럼 버리고, 크고 작고, 많고, 갖고 싶은 그런 생각들을 훌쩍 버리면 여러분 진실한 회향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회향을 해서 근심 걱정 없이 살기 바랍니다.

저한테 걸망이 하나 있는데, 제가 여러분들께 고통을 담는 걸망에 다 버리라고 했는데도 버리지 못합니다.

어떤 불자가 저를 찾아와 근심 걱정이 있다고 하면, 그 불자한테 “그것 봐.

그것 봐! 내가 달라고 할 때 안 주고 갖고 있더니.”

여러분, 고통은 나한테 다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진실입니다.

여러분 고통 제가 다 머리에 짊어지고, 극락을 가든 천상을 가든 제 마음입니다.

제가 걸망을 지고, 전국을 돌아다녀도 차지 않습니다.

아직도 차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보물이 있습니다.

오늘 못 가져가면, 내일, 내년에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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