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맑은 가난의 미덕 실천해야

법정스님

하안거 해제 법문 “맑은 가난의 미덕 실천해야” 잘 지내셨습니까? 힘든 여름이었습니다.

더운 날 정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정진하는 모든 불자는 법의 나이 즉, 법랍(法臘)을 보태게 됩니다.

법랍을 한 살 보탤 만큼 착실히 정진을 잘 했는지는 각자 점검해 봐야합니다.

나는 해제날 통영 미래사에서 계를 받았는데, 중노릇을 제대로 했는지 아닌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옛날 농사를 짓던 시절에는 절기에 민감했습니다.

절기가 아주 분명했습니다.

계절 변화는 바람결에 숨어 있습니다.

처서 날, 오전 오후 바람결이 다릅니다.

오전 바람에는 습기를 머금고 있고, 오후 바람은 마른 바람 결입니다.

마른 바람이 불면 떠나려는 충동을 일으킵니다.

이때쯤 삼베옷을 벗어 말려 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변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요즘 날씨는 계절의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한반도가 아열대 기후로 바뀐 탓입니다.

지구가 중병이 들어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허덕이며 내뿜는 열기가 온난화입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가 중병에 신음하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지구 자체가 큰 중병이 들었어요.

현대문명은 석유문명입니다.

석유가 없었다면 이런 모임도 못했을 것입니다.

과도한 석유 소비로 인한 배출 가스가 지구 온난화를 가져옵니다.

그 전 같으면 장마가 끝나면 비가 그쳐야 하는데 오히려 그 뒤에 비가 더 옵니다.

과도한 화석연료의 소비 때문입니다.

요즘 지나온 자취를 되돌아보며, 좋은 스승님의 은혜에 새삼스럽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옛 스승 중 한분이신 慈雲스님이라고 율사 스님이 계셨습니다.

공부가 끝나고 해제 때에 계를 받는데, 저도 이 때 비구계를 받았습니다.

비구계의 계사스님이셨는데, 제가 보낸 문안 편지에 짧은 답장을 보내셨습니다.

“소욕지족 소병소뇌(少欲知足 少病少惱)”라는 짧은 글이었는데 지금도 가끔 떠올립니다.

소욕지족 소병소뇌, 적은 것에 만족 하면 적게 앓고 적게 걱정한다는 말이죠.

두꺼운 만년필로 또박또박 적어 보내 주신 가르침입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요즘엔 모든 소식을 전화나, 메일로 모두 전하니 그리움이 고이지 않습니다.

그리움이 고이지 않으니 편지를 쓸 필요도 못 느끼고, 그립고 아쉬움을 모르는 황량한 세태 속에서 살아갑니다.

미래는 오늘의 연속입니다.

우리의 태도에 따라 더 나빠지기도 하고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생태 윤리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어머니인 지구의 건강을 위해서 자식 된 도리를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윤리는 말보다 실천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순간순간의 결정에 달렸습니다.

이 여름 물보살과 함께 지냈습니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물을 끼얹기도 하고 씻어 내면서 보냈습니다.

물이 아니면 어떻게 씻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물의 은혜 많이 입었습니다.

“물보살님! 감사합니다.” 어디 고마운 존재가 물뿐이겠습니까? 흙이나 공기, 바람이 다 고마운 존재지요.

지·수·화·풍이 모두 근원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흥청망청 살다보니 우리를 받쳐주는 흙, 바람, 햇빛이 제 기능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지구 환경을 볼모로 하는 것입니다.

생산되는 물자를 소중히 다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재앙이 되어 되돌아옵니다.

우리는 맑은 가난, 즉 청빈(淸貧)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적은 것으로 넉넉해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해야 합니다.

‘소욕지족’이란 갖고자 하는 욕망을 자주적으로 스스로 억제하는 것입니다.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거나 시새워하지 않고 자신의 것에 만족하여, 불필요한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이야기 합니다.

먼저 갖고자 할 때 갖지 못한 이들의 처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이웃이 가난한데 나 혼자 많이 가졌다면 그것은 남의 것을 가로챈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주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내 것이란 없는 것이죠.

지금도 하루에 3만 5천 명의 어린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자료가 5~6년 전의 자료이니 지금은 하루에 4만 여명의 어린이들이 굶어 죽어갈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앞으로 물질적으로 더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굶 주림의 재앙이 반드시 옵니다.

확신합니다.

그것은 가정이나 절이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음식을 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잘 사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음식을 버리지 않습니다.

지금 세계 전역에 10억여 명의 사람들이 하루에 1달러, 우리 돈으로 950원을 가지고 연명을 하는 실정입니다.

다들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더 크고, 더 높고,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많은 것에 대한 욕망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져서 행복하십니까?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넘치면 이웃의 사정을 전혀 돌보지 않습니다.

적게 갖고 아끼는 삶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삶입니다.

아쉬움과 궁핍을 모르면 불행합니다.

아쉬움과 궁핍함을 통해서 귀하고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넘치는 것은 모자라는 것만 못합니다.

넘치게 되면 이웃 사정을 모릅니다.

이웃의 고마움을 모르기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요즘 입만 열면 경제 타령입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경제 성장을 향해 질주하는 것은 지구의 종말을 재촉합니다.

선진국은 물론이고,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신흥 개발도상국들로 인해 야기되는 지구 온난화의 원인을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개선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습니다.

올해 말에 청와대의 주인이 바뀐다고 하는데 그곳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습니다.

모두들 경제 타령만 합니다.

기상학자들은 금세기 안에 지구의 온도가 섭씨 5~8도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이렇게 살면, 히말라야를 비롯한 빙하들이 40년 안에 모두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해수면이 높아져서 사람이 살기 어려워집니다.

베트남의 메콩강, 중국의 양쯔강과 같이 큰 강들이 물이 달리게 되어 식량을 생산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살 수 있겠습니까? 또 지면의 낮은 곳은 물에 잠겨 사람이 살 수 없게 되겠지요.

지구에서 후손들까지도 살아남게 하려면 현재의 생활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겸손하게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삶의 질은 물질적 풍요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여건에서도 깨어 있다면 삶의 질은 향상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받아쓰는 것은 4,50년전 조상들이 아끼고 가꿔온 덕입니다.

더위에 건강하고 맑은 가을을 맞이하십시오.

2007년 8월 27일 월요일 11시 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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