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낫한스님─귀향중에서___(2)

틱낫한스님

─귀향중에서…(2)

행복에 대한 고정 관념이 있다면 이미 행복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평생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정관념이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행복해지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 가지 방법에 붙들려 있으면 곤란합니다.

어느 젊은 여성이 말합니다.

“저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 바에는 죽는 것이 낫다.

저 사람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그러나 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저 사람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니까요.

어떤 개인이나 국가가 행복에 대해 고정 관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 일단의 사람들이 있어 자기 나라가 어떤 이상을 실현했을 경우 아주 행복하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 이상이 경제정책일 수도 있고, 신학일 수도,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 나라가 이런 이상을 너무 확신하게 되면, 이상을 보호하고 신장하는 데 어떤 희생이 닥치더라도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행복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사람을 반대하고, 그 때문에 결국엔 전체주의 국가가 됩니다.

이런 이상을 신장하고 실현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할 정부나 정당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70년이나 100년을 보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러는 동안 나라에는 많은 비극이 생겨나고 시민들의 고통이 극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 길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구소련 같은 나라에서는 행복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 사람들을 정신병동에 집어넣었습니다.

행복에 대한 하나의 생각을 따르기 위해 어처구니없게도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고생시키고 진정한 행복을 말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어느 나라든 행복에 대한 한 가지 고정관념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자기들의 생각이 완전한 것도 아니고, 현실이나 국민들의 참된 필요나 희망사항들과 부합되지 않는 면도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라에서는 모든 국민이 영웅이 될 것을 바라지만, 국민들은 영웅이 되기 싫을 수도 있습니다.

국가가 공정된 행복관을 버리는 순간 새로운 기회가 옵니다.

종소리를 듣는 것, 마음을 다해 숨쉬는 것, 앉아서 명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절대 “내가 앉는 법이 최고다” 또는 “내가 걷는 법이 최고다” 또는 내 화를 다스리는 법이 최고다“하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어떤 것을 거지고 그것을 절대 진리라고 믿으면 우리는 닫힌 사람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해나 통찰에 더 이상 열린 마음을 가지고 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믿음의 대상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나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박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나 행복이나 니르바나에 대한 저의 생각이 절대적이라고 믿게 되면 저는 제 생각을 여러분에게 강요할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나처럼 믿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의 생각을 여러분에게 강요하거나, 심지어는 여러분을 망치려고도 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믿음의 이름, 사랑의 이름으로 서로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믿음과 사랑의 대상이 참된 통찰, 고통이나 행복을 겪어본 직접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순한 관념이나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에 대해서 어떤 고정 관념을 갖는다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신에 대해서, 니르바나에 대해서, 부처님에 대해서 고정 관념을 갖는 것은 더욱 위험합니다.

어느 날 한 선사가 법어에서, “부처님”이라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사는 얼떨결에 이 말이 자기 입어서 나온 것을 알고 잠시 쉬었다가 “나는 부처님이라는 말을 쓰기 싫어합니다, 그 말에 대한 알레르기 증세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실 나는 부처님이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올 때마다 화장실에 가서 세 번 이상 입가심을 합니다.” 부처님이라는 말이나 부처님이라는 고정 관념은 큰 오해의 요인이 되기도 했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도 부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을 가지고 계신가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생각이나 관념들을 위해 낭비하기에는 삶이 너무도 고귀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생각이나 관념, 개념만 먹고 삽니다.

곰곰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하루나 이틀, 사흘 동안만 이런 생각이나 관념이나 개념을 먹고 살 뿐 아니라 일평생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니르바나, 부처님, 정토,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 등의 개념은 그저 개념일 뿐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개념들 때문에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해서는 안 되니까요.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삶이란 오로지 이 순간에만 있습니다.

우리의 주의가 산만해지면, 우리의 마음이 몸에서 떠나 있으면, 자기 삶과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것입니다.마음 다함은 우리 속에 있는 부지런함의 에너지를 활용할 때 생기는 실천의 열매입니다.

일상적인 우리의 삶에 매 순간 부처님이 태어나고 예수님이 태어나도록 하는 실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나 초파일에만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매일 크리스마스요 매 순간이 초파일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아기는 매 순간 계속해서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결이 출렁입니다.

그러나 물 자체에는 출렁임이 없습니다.

물결은 스스로 태어남과 죽음이 있고, 태어남이란 물결이 생기는 것이고 물결이 내려감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물 자체에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물결이 물을 이런 생각, 저런 개념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물결은 결코 물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맙니다.

내일이나 어제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 뿐입니다.

걱정을 너무 많이 하면 괴로움이 따릅니다.

이 말은 현재의 순간과 깊이 접촉하는 훈련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내일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과거의 일도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지금입니다.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떡 속에서 햇빛을, 떡 속에서 창공을, 떡 속에서 구름과 대지를 볼 수 있습니다.

떡 한개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이 떡 한 개를 여러분에게 가져다주기 위해서 온 우주가 여기에 함께 화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생명력 있게 살기 위해서 이 떡을 먹습니다.

이 떡을 먹음으로써 생명을 얻습니다.

열심히 수행하다 보면 어느 날, 부처님은 사실 다른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부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부처님을 이루는 요소는 마음 다함, 이해, 자비의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 다섯가지 수련법 다섯가지 마음 다함의 수련법을 연구해 보면, 만약 인류가 이를 실천하기만 한다면 세상에 평화와 사랑과 안정과 행복이 깃들이게 되리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불교인이든 불교인이 아니든 모두가 이 수련법을 실천하기만 하면 평화와 안정과 행복은 실현이 될 수 있습니다.

1.

나는 고통이 생명을 파괴하는데서 온다는 것을 깨닫고, 자비심을 배양하여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광물의 생명을 보호하는 길을 배울 것을 서원한다.

나는 나 스스로도 죽이는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죽이는 것도 허용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서, 내 생각에서, 또 내 실생활에서 어떤 형태의 죽임도 방관하지 않기로 결심한다.2.

나는 고통이 착취와 사회적 불의와 부정과 억압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자애심을 배양하여 사람들과 동물들과 식물들의 안녕을 위해 일하는 길을 배울 것을 서원한다.

나는 나의 시간과 정력과 물질을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너그러움을 실천하기로 결심한다.

나는 스스로 훔치는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에게 속한 것을 소유하지도 않기로 작정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들이 인간들의 고통이나 지상에 있는 동식물들의 고통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3.

나는 고통이 성적 비행에서 야기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책임감을 배양하여 개인과 부부와 가족과 사회의 안전과 순결성을 보호하는 길을 배울 것을 서원한다.

나는 사랑과 장기적인 약속 없이 성 관계에 들어가지 않기로 결심한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하여, 나는 내가 한 약속과 다른 사람들이 한 약속을 존중하기 한다.

나는 어린이들을 성적 학대로부터 보호하고 부부와 가족이 성적 비행 때문에 파탄의 경지에 이르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4.

나는 고통이 생각 없이 내뱉은 말과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 모르는 것에서 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고 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사랑스런 말을 하고 남에 말에 귀 기울이는 힘을 배양할 것을 서원한다.

나는 말로써 행복을 증진시킬 수도 있고 고통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자신감과 기쁨과 희망을 고취시킬 말들을 가지고 성실하게 말하기로 결심한다.

나는 내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소문을 퍼트리지 않고,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자를 평가하거나 단죄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나는 분열이나 불화를 조장 할 수 있는 말, 가족이나 공동체의 유대를 깨뜨릴 말을 삼가 한다.

아무리 조그마한 말이라도 모든 갈등을 화해시키고 해결하는 데 나의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5.

나는 고통이 무심코 행하는 우리의 소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다해 의식하면서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 일을 실천하므로, 나 자신이나 나의 가족이나 내가 속한 사회의 유체적 정신적 건강을 증진시킬 것을 서원한다.나는 내 몸과 내 의식에, 그리고 내 가정과 사회의 집단적인 몸과 의식에 평화와 안정과 기쁨을 증진시킬 물질만을 섭취하기로 결심한다.

나는 알코올이나 정신을 몽롱하기 만드는 다른 어떤 물질도 사용하지 않고, 독성이 든 음식뿐만 아니라 특정한 텔레비전이나 잡지나 책이나 영화 등 유해한 요소가 포함된 어떤 것도 사용하지 않기로 작정한다.나는 나의 몸이나 의식을 이런 독성으로 손상시키는 것이 나의 조상들, 나의 부모님, 내가 속한 사회 그리고 후배들에 대한 반역이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나는 나나 이 사회를 위해 적절한 식생활을 이끌어 감으로써 내 속에,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있는 폭력과 두려움과 분노와 혼돈을 변혁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적절한 식생활이 나 자신의 변혁과 이 사회의 변혁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조약돌 하나가 우리의 어머니요, 구름 한 점이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다람쥐 한 마리가 우리의 어머니요, 사슴 한 마리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이것은 모두 사실입니다.

우리를 주위에 있는 모든 현상들과 연결 시키는 탯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것은 어떤 한정된 장소와 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먹는 기쁨을 즐길 수 있도록 때때로 배고플 수 있는 특권을 보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목이 마르지 않으면 콜라 같은 것을 마실 마음도 없습니다.

괴로움이 없으면 행복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사랑의 부처님, 미륵불은 고통 없는 곳에서는 결코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고통이 있는 곳이야말로 사랑의 부처님이 태어나는 올바른 장소입니다.

고통은 사랑을 창조하는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순진하게 이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을 등지고 열반이니 천국이니 극락이니 하는 곳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마세요.

좋은 것은 무엇이나 익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충분한 조건이 이루어지면 우리 속에 오래 잠재해 있던 것을 불러오게 돕니다.

때때로 저는 제 주위에, 그리고 제 속에 너무도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때로는 나무들이 너무도 아름답고, 하늘이 너무도 맑고, 강들이 너무도 장대합니다.

일출, 일몰, 새, 사슴, 다람쥐, 아이들 모두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제 제가 종을 울리겠습니다.

일 분간 같이 숨쉬기를 하고, 다시 계속합니다.

아름답게 앉으셔서 종소리를 받으십시오.

평화의 에너지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다시 태어나도록 합시다.

화가 나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무슨 반응을 보이거나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내 속에 화가 있는 것을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이렇게만 할 줄 알면 분노의 에너지가 우리 자신이나 주위의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부처님은 오늘만 만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께 낮에도 만나셨고 어젯밤에도 만나셨고 또 내일도 만나실 것입니다.

두 분은 언제나 제 내면에 계시면서, 매우 평화롭고 서로 한마음입니다.

제 속에는 부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없습니다.

제 속에서 두 분은 진실 된 한 형제요, 한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예수님은 서로를 차별하는 대신, 참된 형제가 되기 위해 날마다, 아침마다 저녁마다 밤마다 서로 만나야 합니다.

두 분의 만남이 이 세상을 위한 희망입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은 우리 속에서 매 순간 만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 매일의 수행을 통해 부처님의 정신, 예수님의 정신에 깊이 감동받고, 두 분이 우리 속에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 세상의 위대한 희망 베트남, 중국, 한국, 타일랜드를 위시해서 많은 나라에서는 젊은이들 사이에 서로 종교가 틀려 결혼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불교 청년이 카톨릭 처녀와 사랑하게 되면 어려움이 따릅니다.

양쪽 집에서 이 결혼을 막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 비극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 다른 종교에 속한 젊은이들이라도 괴로움을 겪지 않고 결혼할 수 있게 되려면 앞으로 100년이 더 걸릴지도 모스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괴로움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두 남녀가 결혼할 때, 신랑은 신부의 종교를 배우고 실천할 것을 서약하고, 신부는 신랑의 종교를 배우고 실천할 것을 서약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이들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 뿌리를 갖게 되는 셈이고, 이로 인해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녀가 태어나면 그들은 두 전통 속에서 최상의 것을 누릴 수 있도록 기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두 가지 뿌리를 갖고, 그들의 삶 속에 부처님과 예수님 두 분 다 모시도록 권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것은 사람들이 더 큰 관용성을 갖고 다른 종교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더 많이 볼 수 있도록 새로운 새대를 여는 일입니다.

마치 요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프랑스 요리를 좋아한다고 해서 중국 요리를 하면 안 된다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합의에 도달하는데 앞으로 100년이 더 걸린다 하더라도 이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이런 결론에 이를 수 있다면 젊은 세대는 우리 세대나 우리 앞 세대처럼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과를 좋아한다고 합시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사과를 좋아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망고를 좋아하면 안 된다고 말릴 필요가 있을까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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