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상하는 불자의 공부
-혜거스님-
향상심을 가져라 불자(佛子)는 부처님의 아들딸입니다.
깨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 장차 부처가 될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불자의 기본자세는 무엇이 어야 할까? 바로 보리심(菩提心)입니다.
깨닫겠다는 마음, 깨달아 부처가 되겠다는 보리심을 발하여야 합니다.
깨달음의 자리, 부처의 자리로 나아가겠다는 보리심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 보리심을 보다 알기 쉽게 바꾸면 향상심(向上心) 입니다.
향상심! 그것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겠 다는 결심으로, 재가불자든 출가승이든 이 향상심은 꼭 있어야 합니다.
‘조금 더 나아지겠다’는 이 결심 을 불교에서는 발보리심(發菩提心) 또는 발심(發心)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 지금의 업(業)보다 내일의 업을 더 좋게 만들 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모두가 향상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향상이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향상하고자 하는 마음이 계속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고, 중도하차를 하고 마는 것입니다.
‘꼭 한 번 잘 해보고 싶다.
이것만은 성취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있다면 성취될 때까지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마음을 놓치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을 때, 그 뜻과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가 될 성품인 불성(佛性)을 지녔습니다.
그러므로 못 이룰 일이 없습니다.
불교를 알든 모르 든, 어느 종교를 가졌든 상관없이 지금보다 더 나아 져야 되겠다는 마음이 끊임없이 계속 이어질 때 불자 로서의 수행은 시작됩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 혼자만 향상하거나 깨닫고자 하지 말고, 모든 사람들과 동시에 향상하고 깨닫겠다는 대승적 인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
하다가 안 될지언정, ‘모든 사람과 함께 깨닫겠다’는 마음을 내어야 참 된 대승의 불자입니다.
대승과 소승의 차이는 넓음과 좁음의 차이요, 깊음과 얕음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대승으로 사는 불자는 한마디로 ‘더 깊고 더 넓게’살아야 합니다.
또 대승 을 공부하는 사람은 ‘더 깊게 알고 더 넓게 알고 싶 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실로 모든 이가 잘 하고자 하고 잘 살고자 하지만, 넓지 않은 사람이나 깊지 않은 사람이 잘 하는 것과 깊고도 넓은 사람이 잘 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전한 시대의 재상인 병길(丙吉)은 어느 날 수레를 타고 저자거리를 지나가다가 살인사건의 현장을 목격하였습 니다.
그러나 그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또 한참을 지나가다가 들판에서 소 한 마리가 비실비실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수레를 멈추게 하고 그 까닭을 살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난리가 났는데도 쳐다 보지조차 않고 지나치더니, 소가 죽은 것도 아니고 비실거리는 것을 보고는 왜 저렇게 야단이실까? 재상께서는 사람보다 소가 더 소중하다는 것인가?’ 의아해진 옆의 사람이 까닭을 묻자 재상 병길은 말했 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포도대장 한 사람이면 해결이 됩 니다.
누가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재상까지 나설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소의 문제는 다릅니다.
소가 비실비실 거리고 있다는 것은 자연환경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뜻하고, 전 백성이 농사를 짓느냐 못 짓는냐 하는 중대한 문제가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재상이 되어 온 나라와 백성의 생명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무엇에 관심을 갖겠소?” 이것이 깊고 얕고, 넓고 좁은 차이입니다.
모든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재상이 가던 길을 멈추어 살피는 것이 당연하고, 개인의 일이라면 마땅히 처리할 자리에 있는 사람을 믿고 그냥 간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할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에, 안타깝고 미안 하지만 그냥 지나치는 것입니다.
예전에 대통령 중 한 분이 학생사건이 일어나자 바로 담당 경찰서장을 찾아가서 힐책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위의 경찰국장이나 경철청장은 할 일이 없어 집니다.
대통령이 직접 다 해버리면…
이런 것이 깊지 않고 넓지 못하여 생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종교인은 넓고 깊게 살고자 하는 대승 의 향상심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럼 이 시대의 종교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부처님이나 공자님 당시의 종교는 대중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국민의 교육을 학교가 담당합니다.
종교가 담당하던 큰 부분을 학교 교육이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종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종교가 찾아서 가르쳐야 합니다.
곧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어느 정도 커진 사람 을 종교가 더 커지도록 가르치는 것이 종교인의 몫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종교가 어느 정도 높아진 사람을 훨씬 아래쪽으로 끌어내리는 역할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종교는 앞으로 유지도 되지 않을뿐더러 있어서도 안 됩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여도 감기나 폐렴 등의 병에 걸리면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하였는데, 굿 덕분에 정신적인 안정을 얻어서인지 더러 낫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감기나 폐렴에 걸리면 굿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기 때 문입니다.
대신, 요즈음의 무당집에서는 천도재나 재수 굿 등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필요 이상으로 자주 행하여집니다.
물론 천도재 자체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천도재를 지내는 것도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긴 있습 니다.
그러나 그보다 높은 공부가 얼마든지 있지 않 습니까? 지금 병든 사람이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의학이나 학교 교육이 굿의 효력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에 필요치 않게 된 것입니 다.
그러므로 지금의 종교는 한 차원 높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향상시켜야 하며,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는 사람들을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월간 [법공양]8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