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장스님─우리의 소원은 성불

■우리의 소원은 성불/

법장스님

■ 교법(敎法)의 바다는 아난 존자(阿難尊者)의 입을 통해서 넘쳐났고, 선(禪)의 등불은 가섭 존자(迦葉尊者)의 마음에 의해서 전해졌는데 말이 아니면 말 없음을 나툴 수 없고, 형상이 아니면 형상 없음 또한 나툴 수 없으니 부득이 설법의 자리(法座)에 올랐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成道)를 하시고 최초에 이르시기를, “내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일체의 중생들이 바른 깨달음을 얻었고 일체의 중생들이 열반에 든 것을 보았다.

한 중생도 부처의 지혜를 갖추지 않은 이가 없지만 단지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내가 이제 성스러운 도로써 가르쳐 그 망상을 영원히 여의고 자기 몸 가운데 있는 부처의 넓고 큰 지혜를 나와 다름없이 깨닫게 해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한 중생이 고행을 통해서 부처님이 되시고 나니 함께 숨쉬고 사는 모든 중생이 다 중생이 아니라 본래 부처님인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해서 중생이라고 자칭하며 서로 어울려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자랄 때 말을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아이도 말 못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 말을 못하고 걸을 수 있는 건강한 아이도 서고 걷는 것을 안 가르치면 혼자 걷지 못하는 것처럼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중생은 당연히 신(神)에 매여서 고통 속에 살고 구속 속에 살고 정해진 운명 속에 사는 것이라 믿고 신을 향한 가장 충직한 노예가 되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스스로 생로병사의 고뇌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시고 영원한 삶의 주인공이 되시어 중생들에게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해탈문(解脫門)을 열어 보이시니 하근(下根)한 중생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덜컥 의심부터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법화경(法華經)에 이 때의 부처님의 심정을 설하셨는데 요약하자면, “내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은 오직 한 가지 큰 인연(一大事因緣) 때문이다.

즉 일불승(一佛乘)으로 바로 중생들에게 부처의 지혜를 열어주고 부처의 도에 들게 하려는 성불(成佛)시킬 목적으로 왔는데 단번에 가르치기엔 중생들의 마음이 너무도 어둡고 어리석고 사악하고 욕심에 젖어있어 제도하기가 참으로 어렵구나.

더욱이 중생들이 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않고 헐뜯고 비방하여 그 죄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그렇다고 소승(小乘)만 설할 수도 없으니 과거 부처님들께서 행하신 방편을 따라서 나 또한 삼승(三乘;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설하리라.”하셨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말씀드리자면 부처님께서 이루셨다는 궁극의 도를 우리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佛性)을 지녔으므로 결국에는 불과(佛果)를 얻게 되는데 단지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살살 달래서 공부시키느라 설법을 듣고 해탈을 한 성문승(聲聞乘)과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깨달은 연각승(緣覺乘)과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실천해서 스스로도 해탈하고 남도 해탈케 하는 보살승(菩薩乘)을 잠시 방편으로 부처님께서 인정하신 척하신 것이지 결국에는 삼승의 법신(法身)이 평등함을 깨우쳐 일불승(一佛乘)에 들게 함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이 크신 자비방편을 알면서도 섣달 초하루부터 산중의 대중스님들과 용맹정진(勇猛精進)하다 오늘 새벽 죽비 소리에 일어나 별을 보며 어찌 아직도 중생의 눈으로 저 별을 보는가 싶어서 실로 스스로 부끄러웠습니다.

산승이‘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날’이라고 스님들께서 청해주셔서 대법회에 오긴 하였습니다만 올해도 제 자신이 성도한 날이 못 되니 부처님의 뜻을 받들지 못한 처지라 스스로를 경책할 따름입니다.

만공 스님(滿空禪師)께서 “장맛이 짠 줄만 알면 공부할 수 있다.”고 하셨고, 역대 조사(歷代祖師)께서는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법계(法界)를 주름잡으며 무애도인(無碍道人)으로 사바세계를 무대 삼아 훨훨 춤을 추며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고, 잠이 오면 잠을 자며, 눈 속에서나 불 속에서나 편안한 가운데 인연 따라 중생을 제도하며 대장부의 삶을 산 것을 생각하면 오늘 법회에서 대중 모두 부처님의 성도만을 찬탄하는 공덕만 지을 것이 아니라 우리도 기필코 성도하리라는 발원을 하고 정진을 다시금 시작해야겠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인간으로 태어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만났으나 부처님 가신 지가 오랜지라 뜻이 분명한 대승의 수행자는 점점 줄어들고 안일을 좇는 구복자(求福者)만 점점 늘어나다보니 우리나라 불교 역시 수행보다는 기복불교(祈福佛敎)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서 대단히 아쉬운 감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불자들은 복을 비는 것을 가지고 도를 닦는 것으로 착각하고 공을 드리며 욕심을 버리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따르지 않고 여섯 도둑(眼·耳·鼻·舌·身·意)의 지시를 먼저 따르고 있으니 복은 늘어가지만 마음 속에 삼악(三惡; 탐·진·치)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참다운 불자의 길을 가려고 원을 세웠으면 마음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끝없이 일어나는 삼악을 걱정해야지 언제까지 삼악이 시키는 것에 끌려서 기도하려고 합니까? 이 세상의 아무리 훌륭한 명의(名醫)도 삼악을 고치는 약은 만들지 못합니다.

삼악에 찌든 환자는 오직 스스로 고쳐야 할 뿐입니다.

평생 절에 다니며 기도하고 정진하는 불자들 중에 욕심을 채우려고 기도한 사람과 도를 이루려고 정진한 사람을 비교할 때 그 결과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재산을 원해서 공을 드렸으면 부자가 될 것이요, 명예를 원해서 공을 드렸으면 명인이 될 것이요, 자식을 원해서 공을 드렸으면 부모가 될 것이요, 깨달음을 원해서 공을 드렸으면 도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을 원대하게 세워서 정진해야 합니다.

음력 4월 8일이 부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심을 보여주셨다면 음력 12월 8일은 부처님께서 법신(法身)으로 우주에 충만하심을 보여주신 것이니 우리도 모름지기 정진해서 법안(法眼)과 혜안(慧眼)을 갖추어 부처님의 실상(實相)을 친견하고 찬탄하여야겠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법(法)을 보는 자 나를 보는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부처님 가신 지 오램을 한탄하지 마시고 오직 가르침에 의지하여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우리의 소원은 성불’이라는 노래를 다같이 불러 봅시다.

“우리의 소원은 성불, “꿈에도 소원은 성불, 이 정성 다해서 성불, 성불이여 오라….”

-전 조계종 총무원장, 열반에 드신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