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담스님─나를 찾는 것만이 평화찾는 길이요

나를 찾는 것만이 평화찾는 길이요

-원담스님-

“사람과 자연은 한 뿌리 조화이룰 때 평화와요” “네 마음 고향어디냐” 만공스님 주신 말씀 아직도 화두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나를 찾는 것만이 평화찾는 길이요 불교의 정법을 찾는 길 입니다” “생활에서 깨달음 찾되 밖에서 구하지 마세요” 집착때문에 방황과 고통…방하착해야 벗어나 새해들어 사람들은 저마다 희망과 바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매년 찾아오는 새해임에도 뭔가 좋은 일을 꿈꾸는 것입니다.

좋은 마음을 내고 그윽한 생각을 취하는 것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생은 해가 바뀌든지 달이 바뀌든지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새해에 달라지기를 기대한다면 스스로 자신을 더 잘 아는 마음을 늘려야 할 것입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막상 해보면 꽉 막힙니다.

꽉 막힌 그 자리 모르는 그 놈 모를 뿐입니다.

모를 뿐인 것을 끌고 나가는 것을 우리는 참선이라고 합니다.

옛 조사스님들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깨닫고자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은 지신일 뿐이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불입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專)을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문자는 세우지 않고 또 그 문자에서 가르치는 진리 즉 마음만을 전할 뿐입니다.

우리는 허공꽃의 어지러움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 마음 속에 지닌 부처님 뿌리를 발견하고 여기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행복을 얘기합니다.

행복을 찾아 헤매이다 지쳐 집에 돌아와 담 넘어 매화가지에서 꽃망울 터진 것을 보고 봄이 옴을 느꼈다고 하듯이 실로 우리는 공기속에 살면서 공기를 찾고 있습니다.

진리를 스스로 몸 안에 가지고 있으면서 밖에서 진리를 구하고 있단 말입니다.

결국 만인이 귀착해야 할 깨달음은 멀리서 다른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12세되던 해였습니다.

수덕사 견성암 도명스님이 속가 이모이셨습니다.

스님따라 절구경왔다가 지금까지 온거지요.

이곳에 와서보니 어린 마음에도 세상에서 제일 살기좋고 잘사는 사람이 스님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만공(滿空)스님을 뵙고 그대로 출가했습니다.

만공스님을 처음 뵈올적에 생각이 나는군요.

머리는 하얀 노만공스님이 “어디서 왔느냐?” 물으세요.

“충남 서천에서 왔습니다” 했더니 “서천의 고향은 어디냐” 또 물어요.

무슨 소린지 모르고 “역시 서천입니다” 하니 껄껄껄 웃으시며 “내가 묻는 뜻은 네 몸땡이 생긴 고향을 묻는 것이 아니라 네마음 생긴고향이 어딘가를 묻는 것이다” 얘기하시대요.

그래서 그 말씀이 상당히 뜻이 깊은 말씀인지를 알고 지금까지 화두로 들고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나를 찾는 것이 불교의 골자를 찾는 것입니다.

불교를 똑바로 찾으려면 나를 찾아야 돼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나를 찾는 것만이 평화를 찾는 길이요, 고향을 찾는 길이요, 불교의 정법을 찾는 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찾을 생각보다는 밖에서 무엇을 구하려고 애를쓰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경허스님께서 주석하시던 天蔣寺(천장사)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정혜사에서 공양주·채공을 할적에 하루는 벽초(碧超)스님께서 나를 불러 이르시기를 “만공 큰스님께서 네 시봉을 받고싶다 하시니 잘 모시거라” 하는지라, 그날로 전월사(轉月寺)에 올라갔습니다.

만공스님을 시봉하게된 인연은 저에게 큰 행운이었지요.

큰스님을 가까이서 모시며 공부하고싶던 차여서 기쁜 마음에 큰스님을 부처님처럼 모시며 살았어요.

생각해보면 그때가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요즘 수행납자나 불자들이 간혹 찾아와 공부하는 법을 묻곤합니다.

그때마다 만법 귀일(萬法歸一) 의 화두(話頭)를 짊어졌던 옛생각이 절로 납니다.

예전에 천장사에서부터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어쩌구 하던 그것이 궁금했는데 하루는 어느 선객스님이 큰스님을 찾아와 화두를 타는데 몹시 궁금한지라 부엌에서 일하다 말고 귀를 쫑긋세워 들었습니다.

만공큰스님 하시는 말씀이 “옛날 한 중이 조주화상에게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럼 그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萬法歸一 一歸何處)’하고 물으니, 하나가 어디로 돌아가는 지는 묻지 않겠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란 무엇인가 (萬法歸一 一是甚麻)”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객스님이 돌아간후 큰스님 방에 들어가 “저도 이제부터 참선을 할랍니다”하니 예의 그 화두를 내려 주시고는 “어디 한번 잘 해보거라”하시며 빙그레 미소지으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후 나름대로는 참선합네하고 떠벌였지만 실상은 거의 잊고 살았는데 하루는 큰절에 내려오니 어느 스님이 부처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팔상록(八相錄))을 주셔요.

몰래 전월사 뒷방에서 읽고있는데(만공스님께서 책 보는것을 엄히 경계하시던 터라) 만공스님께서 문을 열어보시더니 아무말 없이 그냥 가시는 겁니다.

쫓아가 무릎꿇고 참회를 드리니 “네놈이 참선을 한다고! 저 아랫마을 강아지가 성불하면 했지, 네 놈은 성불할 수 없겠다.

차라리 염불이나 배우고 선업을 쌓는것이 좋겠다”하시더군요.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절망속에 죽고싶은 마음밖에 안들었습니다.

이왕 죽을바에는 나도 한번 참선이라도 잘 해보고 죽어야 겠다는 분심(憤心)이 일어나 그전 화두에 대한 새로운 의심이 솟아나더라 이말입니다.

만공 큰스님께서 항상 “참선을 옳게 잘 하려면 천연의 의심이 돗발해야 하느니라”하시었는데 아마 그때 나도 천의(天疑)가 비로서 돗발하였던 것 같아요.

그래 만공스님 추상같은 꾸지람을 듣고는 “성불 못할바에는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생각했어요.

그래도 이왕 죽을 바에는 참선을 하다 죽어야 겠다 생각하고 전월사 뒷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시계를 보며 자정까지 오롯하게 화두를 들면 죽지않고 수마에 떨어지면 죽어야겠다 하고 참선을 했습니다.

여러분, 불자가 되겠다고 맘을 세웠으면 반드시 궁속에 도달해야 할 깨달음을 목숨걸고 구하십시오.

죽는다는 그 마음조차 버리고 용맹정진 하세요.

행주좌와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맘을 쏟으란 말입니다.

그후 일제말기라 내게도 징집영장이 나왔기에 어떻게 해야할지 만공스님께 여쭈었습니다.

만공스님은 “일제는 반드시 머지않아 망(亡)하느니라.

너는 간월도에 들어가 조국광복기원 천일기도를 하며 지내거라”하셨습니다.

회향후 돌아오니 일본의 패망과 조국의 광복 소식을 듣게됐습니다.

만공스님께서는 그 즉시 정혜사로 내려가셔서 무궁화 꽃잎을 따서 먹을 듬뿍 묻혀 ‘世界一花(세계일화)’라 쓰셨습니다.

스님이 보여주신 것은 너와 나, 해와 달, 공기와 물이 둘이 아니며 같은 뿌리, 같은 근원을 갖고 있다는 뜻이었지요.

요즘 사바세계는 어디를 보나 사람들이 공포심 분노심 불평등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 바다에 사는 동물 식물까지 모두 “평화를 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모두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고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평화가 오고 비로소 한 뿌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일화’의 정신이야말로 온 인류(人類)가 함께 받아 안아 실천해야 할 정신이라 믿습니다.

만공스님께서는 열반직전에 최후설(最後說)을 통해 “내 법문이 들리지 않을때에도 사라지지 않는 내 면목(面目)을 볼 수 있어야 하나니라” 하시었다하니 실로 큰스님께서는 ‘인간 가운데 가장 인간다운 분이요, 인간의 진면목이시고 또 허공과 같으신 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허공이 어디 없어지고 말고 할것이 없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나를 찾기 위해서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아 생사를 벗어나는 대자유를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멋지고도 멋진 일입니까? 이미 그 깨달은 경지에는 이런 마음 저런 마음이 하나도 남음이 없는 것입니다.

들어도 들은 바없고 보아도 본 바 없는 가운데서 자기일을 충실히 하는 것입니다.

충실하되 보는 놈, 듣는 놈, 먹는 놈, 입는 놈 그 놈을 똑똑히 보면 그대로 여래가 된다는 말입니다.

달마조사가 ‘안으로 헐떡거리는 마음을 쉬고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게하라’하신 그 뜻입니다.

그리고 ‘놓아 버리는 것’이것이 지름길 입니다.

부처님께서 한 때 고요한 곳을 거니시며 생각하고 계셨는데 한 바라문이 부처님께 꽃공양을 올리려고 꽃을 가지고 왔습니다.

갑자기 부처님께서는 “놓아버려라” 하셨답니다.

그러자 바라문은 오른 손에 들었던 꽃을 놓아 버렸습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놓아버려라”하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러자 바라문은 왼 손에 들었던 꽃을 놓아 버렸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또 “놓아버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라문은 멍청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바라문이 가지고 있던 모든 관념과 사고와 주관적 판단 그리고 모든 인간적인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영원할 것처럼 세속적인 것에 착심해서 살고 있습니다.

삶에 어지간히 집착하고 있습니다.

탐 진 치 삼독에 가득 물들어 있습니다.

많은 중생들이 탐 진 치심에 삶이 쏟아져 오늘날까지 이끌어 왔을런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4대가 흩어지고 안광낙처시에 무슨 영항을 미치겠냐는 것입니다.

불나비가 제 죽을줄 모르고 불속에 뛰어 드는 것과 같고, 예리한 칼끝에 묻혀져 있는 꿀을 빨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모양지어진 것에 집착해 보지만 잡으려들면 신기루와 같이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집착하기 때문에 끝없는 방황과 착각과 고통에서 허덕일 뿐입니다.

답은 부처님이 주셨듯이 방하착(放下着)하십시오.

진실로 삶의 참된 의미를 알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놓아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때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이 나툴 것입니다.

입산후 행자생활을 무려 5년 가까이 하였습니다.

많은 스님들이 상좌를 삼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이미 마음속에 정한 스님이 있습니다”하고는 버틴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만공 큰스님께서 조용히 불러 이르시길 “네가 이제 은사스님을 정해야 할터인데, 내 생각에는 벽초스님이 선지가 밝으니 그 스님을 은사스님으로 하여라”하시는지라, 벽초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습니다.

물론 만공스님께서 계사가 되어 주셨습니다.

나의 은사이신 마벽초스님은 힘이 장사이신데다 일하는 방법을 알아 웬만한 도편수 저리 가라는 식으로 온 갖 대소불사를 주관셨으며 선지에도 뛰어나 선농일치의 삶을 살아오신 ‘한국의 백장스님’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스님은 일을 수행으로 삼으셨습니다.

항상 양손에 소가 먹는 여물을 들고다니셨어요.

만공 큰스님이 내 법의 스승이라면 벽초스님은 내 중노릇하는 삶의 스승이셨습니다.

만공스님께서 열반에 드신후 비로서 처음으로 몇해를 전국 곳곳을 유력한 적이 있습니다.

통도사 극락선원을 찾아가니 경봉스님께서 “어데서 왔는고?” “덕숭산에서 왔습니다.” “스님은 누구 누구시냐?” “송만공 스님 입니다.” “만공스님께서 무슨 법을 보여주더냐?“ 하시기에 두주먹을 쥐고 손을 높이 쳐들며 “이것을 뵈어주리다.

스님께서도 이것이 있습니까?”하니 허허 웃으시며 앉으라 하시었습니다.

이렇게 나 말고는 부처가 따로 없고, 부처 말고는 내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를 찾는 것이 곧 자기를 찾는 것이요, 자기를 찾는 것이 곧 부처를 찾는 것입니다.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님을 깨달아 마치는 일이요, 이것이 바로 인생의 결제요 해제를 뜻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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