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생명 나의 한 부분‘차별없는 사랑’ 원력 갖자
-지관스님-
·47년 해인사에서 자운스님 은사로 출가 ·표충사, 동화사, 해인사 강사역임 ·76년 동국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 ·86년 동국대총장 역임 ·현재 동국대 교수,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이사장 종교에 입문하게 되는 사람은 나름대로의 내면적 동기를
갖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그 계기를 일별하여 보리심을
발하였다고 하며, 그 보리심은 깨달음의 발단이 되고
불자들이 이상으로 하는 완전한 자유의 종자가 되며
궁극에는 이타의 덕성을 함양시켜 밝은 세상을 구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삼독(三毒)으로 얼룩진 무한생사의 풍랑속에서 진정한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밝기를 헤아리기 어려운 등불을 밝히는 것이요
세간의 빛깔에 비유할 수 없는 장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무변광명과 무한 장엄의 자비를 계발하는 일,
이것이 참으로 보리심을 발하는 일이며 출가입신(出家入信)하는
길입니다.
삼독을 여의는 길이 출가요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
입신의 길이니 참으로 완전히 비우면 만덕(萬德)이
꽉차게 되는 것입니다.
진공묘유(眞空妙有)는 이를 두고 이른 말입니다.
삼독을 비우고 만덕을 기르는 일은 삼학을 근본으로 합니다.
삼독의 파랑은 거칠고 끈질깁니다.
무한광명의 여래종자와 오색장엄의 본지풍광이 덮힘도 이 때문입니다.
계정혜(戒定慧) 삼학은 번뇌와 윤회의 사슬인 삼독을 끊는
보리의 방편입니다.
계를 지킨다 함은 만유불성(萬有佛性)의
종자 즉 보리심을 보호하고 증장하는 일입니다.
산 생명을 죽이지 않는일 이것이 바로 불성을 기르는 일입니다.
나아가 산 생명의 선한 의지를 북돋아 주는 일 그것은
더욱더 적극적인 지계의 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비희사(慈悲喜捨) 네가지 무량한 마음으로 중생을
감싸주는 일은 바로 계학의 대승적 기초가 됩니다.
욕망으로 담을 쌓고 극도의 이기심으로 자기를 지키려는
현대산업사회에서 적극적인 지계(持戒)의 실천은 맑고
투명한 용기로 지켜나가야 합니다.
욕망이 가득한 세상 지계의 실천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선정(禪定)을 수습하는 일 또한 삼독을 제거하고 우리의
본래면목을 되찾는 일 입니다.
회광반조(回光返照)는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늘을 올려다 볼 잠간의 여유도 없이
급격하게 변하는 정보산업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세간법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유한의 조건과 욕망의 밀도를
근거로 지탱하며 또 평가합니다.
속도는 더 빠른 속도로,
욕망은 더 큰 욕망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유한한 조건에 얽매어 있는 현상을 불교에서는 유루법(有漏法)이라
합니다.
칼이 칼로서 영원한 승리를 얻지 못하듯이 욕망은 더 큰 욕망으로
이기지 못하며, 작은 시간을 큰 시간이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유한한 것은 유한한 것으로 정복할 수 없습니다.
선정을 수습하는 일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선정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초월합니다.
빠른 것을 더 빠른 속도로 보려 하는 것보다 정지된 고요함이
오히려 빠른 것을 바로 볼수 있습니다.
달리는 사람은 외경(外境)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조금 느린 걸음은 보다 조금 더 세상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
완전하게 정지된 경우 세상은 또렷하게 보입니다.
출렁이는 호수는 풍경을 비추기는커녕 외경을 어지럽힙니다.
고요한 수면은 삼라만상을 완벽하게 비춥니다.
선정은 보지 못하는 곳까지 보게하며 가지못하는 곳까지
이르게 합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시간과 공간은 오히려
마음의 범주를 객관화한 조건일 뿐 입니다.
선정을 수습하는 일은 정보화 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마음의 빛은 그 무엇보다도 빠르며 마음의 광명은
그 어느 빛보다도 밝습니다.
지혜는 수습하기보다 발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계와 선정이 불가분의 공력을 갖듯이 선정은 지혜를 수반합니다.
마치 백촉의 등잔이 백촉의 밝기를 내듯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있어서 정등(正等)과 정각(正覺)은 불가분의 이치입니다.
개인의 구복을 위하여 기도하거나 중생을 상해하거나 괴로움을 주면서
나만의 해탈을 위해 선정에 들려 한다면 바른 선정에 들 수 없거니와
바른 지혜를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없는 깨달음은 대원력과 원행없이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석가세존과 모든 부처님에게는 반드시 본생담이 있게되는
것입니다.
분별의 인간 지능이 고도화되어 생명마저도 만들어 내는
첨단생명공학의 시대입니다.
분별의 오류를 영원히 넘어선 선정의 수습으로 얻어진
금강반야의 대지혜광명이 그 어느때보다도 빛을 발해야 할 때입니다.
삼학을 수습하여 무상정등정각을 얻으신 모든 부처님은
반드시 중생을 제도합니다.
중생이 없는 부처님은 마음만 있고
몸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에 있어서 자비를 강조함은 이타의
선행이나 세간적 구제의 방편 때문만은 아닙니다.
깨달음의 완성은 반드시 자비를 수반합니다.
석가세존께서 이루신 정각의 내용 연기법은 자비의 실천이
왜 지혜의 완성인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존재함으로 인하여 저것이 있게되며 저것이 없으므로 인하여
이것이 존재하지 않게된다.
(此有故彼有 彼無故此無) 이것이 일어나므로 해서 저것이 일어나게 되고
저것이 멸하므로 해서 이것이 멸하게 된다.
(此起故彼起 彼滅故此滅) 모든 존재와 현상은 상의상존 불가분의 관계속에 놓여져 있다는
연기의 법칙은 진보한 오늘날의 인류종교 사상사에서도 보편적이면서
탁월한 세계관으로 조망받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신심의 기초가 되는 연기의 법칙을 확고한 세계관으로
이해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일심은 시방세계와 삼세로 통해 있습니다.
법신의 체에서 바라보면 이웃은 나의 소중한 부분이며
나 또한 이웃의 한 부분입니다.
인간은 상의상존하는 자연의 분신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만이 자기의 욕망으로 자기의 분신인
자연을 상해하고 그 아픔을 되돌려 받습니다.
그러나 (화엄경)에서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초목을 선별하여
비를 내리지 아니하나니 초목을 적셔준다는 마음마저도
내지않는다 하였으니 자연의 대용을 부처님의 무연자비에 비유하기도
한 것입니다.
행성은 지구의 분신이며, 은하계는 또한 태양계의 분신입니다.
이렇게 나아가 시방삼세 삼천대천세계를 바라다 보면 자비는
단순한 종교의 덕목이 아니고 실존의 필연적인 공존의 법칙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요즈음 강조되고 있는 환경운동 또한 반성할
여지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파괴로 인한 해독이 인간에게 위해하게 되자
비로소 자연을 보호하겠다고 아우성입니다.
환경이라는 말 또한 인간중심을 부르짖던 서구의 사고방식입니다.
인간중심이란 개념이 바로 인간외의 존재를 평등하게 보지않는
어휘이며 환경이란 말 또한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경전에서는 인간이란 개념보다
육취(六趣: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
사생(四生:胎 卵 濕 化)이란 말로 중생의 범주를 평등하게 다룹니다.
인간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게 될 때는 오온(五蘊)의 취합을
강조함으로 해서 오히려 불완전한 실존의 상황을 깨닫게 합니다.
나아가 본래성불(本來成佛)을 천명함에 있어서는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하여 생명의 본질적
자각을 인간만의 것으로 자만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얼마나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중생 사랑입니까! 우리도 부처님의 무연자비를 생존의 법칙으로 삼읍시다.
환경오염이 우리의 먹을 물과 음식을 더럽히기 때문에
보호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동체대비의 자각으로 유정과 무정을
차별없이 사랑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보리심을 발하여
원력을 세우고 삼학을 수습하여 원행을 실행하는 무연자비의
불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아끼고 보호하면 그 상처는 아낀만큼 정직하게 회복됩니다.
그러나 권세와 명예 그리고 아집은 욕망의 수위가 높아 돌아오기가
쉽지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오염시키고 번뇌를 전염시키는
사회환경의 오염은 참으로 우려할만한 일입니다.
우리 종교인들이 해야할 일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욕망의 중독과 전염을 정화시키는 일입니다.
우리 불교는 오랜 수행의 전통과 민심교화의 역사를 간직해왔습니다.
수행의 공덕과 교화의 원력으로 민족 정신사를 장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부처님 가르침과는 다르게 뒤바뀌어 있습니다.
꼬리를 무는 대형사고, 무작위 인명살상, 과(過)소비,
그에 따른 상대적 빈곤과 사회적 불안등 우리는 요즘 국민과 국토가
상처받는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총체적 위기란 결국 절제하지 못하고 충돌하는 욕망의 집단적
포화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구 쏟아낸 우리들의 거친 욕망이
되돌아 와서 그 원인을 묻는 뼈저린 인과상응(因果相應)의 현실입니다.
일체 생명체에 대한 존엄함의 자각이 배제된 무지한 인간의
모든 생각과 모든 행동은 근원적으로 욕망의 범주에 속합니다.
일상의 삶을 시작하는 일로부터 기업을 경영하고 정책을 입안하는 등
모든 생각과 행위의 근본은 일체생명이 존엄하다는 자각에 기초해서
이뤄져야 합니다.
존엄에의 자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생사윤회하는 중생의 생존이 본질적으로 개체적 이기심과 욕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며, 나아가 현대산업사회 또한 그러한 개인적 욕구의
성취를 기초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본질적으로 욕망이 기초한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문명이 발전한 만큼 그 밑으로 감춰졌던 잘못된 과정과 욕망의
결과 또한 거대한 중량으로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몇 개의 카드나 패스포드를 갖고 다닙니다.
이제 온 국민이 필수로 지녀야 할 패스포드가 있습니다.
바로 일체생명이 존엄하다는 자각입니다.
존엄에의 자각을 기초로 반드시 실현해야 할 다음의 과제는
정신의 청정영역(淸淨領域)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향유하고자 하는 맑은 환경은 인간의 청정한 의식과
비례합니다.
즉 인간 마음의 청정이 환경의 청정을 결과하기
때문입니다.
경전에도 일심(一心)이 청정하면 일체가 청정하게 되고 국토 또한
청정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을 위협하는 현상계의 더러움은
근원적으로 그것을 싫어하는 인간 자신의 욕망이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은 정화하는 정신의 청정영역이
넓게 분포해 있으면 거친 생존은 반조(返照)와 참회의 의례를
거쳐 존엄하고 순수한 존재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불교에 있어 개종(改宗)은 종교를 바꾸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개종이란 근본을 바꾼다는 말이니, 불교에 있어 개종은 중생을
버리는 일입니다.
보리심과 무연자비(無緣慈悲)를 망각할 때
불제자는 개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근본을 잃는 것은 진리를 등지는 일이요 보리심을 끊는 일이니
중생이 광명을 잃는 일입니다.
중생이 광명을 잃은 세상에 개인의 해탈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해탈의 몸은 대신(大身)이어서 모든 중생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무연자비만이 해탈의 길에 이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