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스님─이 세상에 내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 세상에 내것이 뭐가 있겠는가 / 송광사 회주 법흥 스님

한국불교의 승맥을 면면히 이어온 순천 송광사.

조계산의 넉넉한 품을 업은 송광사는 언제나 포근함을 전해주는 총림이다.

이맘때면 참배객의 발길이 잦아들어 경내는 한산하다.

하지만 총림의 이면에는 겨울안거에 든 대중들의 치열한 구도열기가 활활 타오르고 있다.

법흥 스님 사진=박재완 기자

송광사를 휘휘 감아 도는 개울을 지나 대나무 숲에서 회주 법흥 스님을 만났다.

허름한 누더기를 걸친 채 한가로움을 즐기고 계셨다.

언제 누가 찾아오더라도 항상 반가워 하는 스님이 이날따라 꾸중 섞인 농담으로 멀리서 찾아온 손을 맞는다.

“내놓을 게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 하러 예까지 왔어! 난 큰스님 아니야.”

하지만 스님은 하룻밤 묵어가고 싶다는 요청에 놀리던 방에 손수 장작을 땠다.

왠만한 산사에는 보일러를 설치해 난방을 하지만 스님은 여태 보일러를 들이지 않았다.

제 몸 편하자고 소중한 정재를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옆에서 모시는 시자스님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요사에는‘방우산방(放牛山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가지런히 정리된 앉은뱅이책상에서 군더더기 없는 수행자의 기품을 느낄 수 있었다.

법흥 스님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책장으로 시선을 던진다.

스님은 고려대 재학시절 책에 묻혀 살던 국문학도였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읽었고,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보며 눈물짓곤 했다.

“산승이 뭐 별게 있나.

하릴 없이 책 보면서 살고 있어.

저 책장에 있는 책, 절반도 못 읽었구먼.”

스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간 정말 그렇게 생각할 일이지만, 스님의 일과 가운데 책을 읽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기도와 참선 등 평생 해오던 수행을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미 생활이 되어버린 기도와 수행을 스님은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리라.

오후 5시, 저녁공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스님은 하던 말을 멈추고 미련 없이 털고 일어선다.

먼 길 왔을테니 공양 먼저 하란다.

주석하고 있는 화엄전을 나서서 후원으로 향한다.

큰절의 어른스님이니 따로 공양상을 받을 만도 하건만, 스님은 대중공양 원칙을 절대로 깨는 법이 없다.

“요즘 대중생활을 꺼리는 수행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왜 대중생활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야.

선방에 앉아서 화두 드는 일만 수행이라고 할 수는 없거든.

함께 부대끼면서 배우는 것도 수행이야.

수많은 관계 속에서 공존하는 것이 부처님법인데….”

법당마다 울려 퍼지던 예경소리를 타고 해가 뉘엿뉘엿 조계산을 넘은지 30여분도 채 되지 않아 송광사에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다.

화엄전을 병풍 치듯 둘러싼 대나무 숲으로 별이 쏟아진다.

부엌의 솥에서 더운 물을 길어 세면한 법흥 스님이 불청객을 위해 책이며, 과일이며 이것저것을 내놓는다.

스님은 늘 이렇다.

행여 누구라도 찾아오면 아까운 것 없이 모두 내주고 만다.

뭐라도 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이 세상에 내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내 것이라고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어.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내 것’에 집착하거든.

소유함이 없이 모든 것을 줌으로써 온 세상을 가질 수 있는데 말이야.”

스님이 건네는 선물 가운데 책은 반드시 챙겨주시는 ‘필수품’이다.

스님이 20여년간 나누어준 책이 어림잡아도 3만여 권이 넘는다.

“책에 길이 있어.

난 그 길을 주고 싶은거야.

받은 사람이 내가 선물한 책을 보면서 발심을 하면 그보다 더한 선물이 어디 있겠어.

받은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받아서 읽고 발심하는 사람이 되게나.”

스님은 기억력이 비상하기로 유명하다.

좋은 경구나 책의 내용을 달달 외는 실력은 나이를 먹어서도 변함이 없다.

대중을 향해 쉴새없이 법문하는 것을 들으면, 부처님 말씀을 빠짐없이 기억했다는 아난존자를 떠올리게 된다.

스님은 경전을 보거나 책을 읽을 때 누구에게라도 들려주고 싶은 문구를 접하면 반드시 노트에 기록해 놓는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암기력을 선보이는 스님만의 비법이다.

그렇게 정리해놓은 노트가 5권이나 된다.

나이 탓으로 상좌들의 법문 요청외에는 거의 응하지 못하지만, 송광사에서 열리는 수련회의 법문은 늘 스님 몫이다.

이때마다 특출난 암기력은 위력을 발휘한다.

끊이질 않고 튀어나오는 스님의 경구 외는 소리를 듣는 이들에게서 웃음꽃이 활짝 피기 때문이다.

밤 10시, 잠자리에 들었던 스님은 오전 5시 성철 스님이 정리한 (대불정능엄신주) 독송으로 아침을 맞는다.

가부좌를 한 채 (법화경) ‘독송요품’과 (관세음보살 보문품) (원각경)‘보안장’ (고왕경) (금강경) (보현보살행원품) 독송이 차례로 이어진다.

경전을 읽는 한 시간 동안 스님의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다.

스님은 발우공양으로 아침공양을 한 뒤 곧바로 경내 ‘순찰’에 나선다.

동이 트지 않은 경내를 모두 돌고 나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1974년 송광사 주지로 부임해 시작한 ‘전각순례’는 주지 소임을 놓고서도 그만두지 못했다.

모든 전각을 돌며 일일이 기도를 올리는 ‘순찰’은 32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지고 있다.

“요즘엔 많이 게을러졌어.

예전 같지않은 몸을 핑계로 법당 안에 들지 않고 밖에서 기도를 올리거든.

그런데 말이야.

너무 오랫동안 계속해 와서 그런지 죽을 때까지 그만두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법흥 스님은 1931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불심이 돈독한 집안에서 자란 법흥 스님은 58년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59년 대구 동화사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통도사 해인사 상원사 대승사 미래사 망월사 등 제방 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한 법흥 스님은 사형인 구산 스님의 청으로 74~77년 송광사 주지를 지냈으며, 84년 조계총림 유나를 역임했다.

이후 33년째 송광사에 주석하고 있다.

법흥 스님의 가르침 우리가 불교를 믿는 목적은 인간고를 벗어버리고 성불하는데 있습니다.

생멸의 세계에서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는 종교가 불교요 사람사람마다 부처님과 똑같은 능력이 있음을 시인하고 자력으로 피안에 가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타력으로 천국에 가고자 하지만, 부처님은 자기자신을 등불로 삼고 일체법을 등불로 삼을지언정 남을 믿거나 남을 의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종교가 많이 있지만 계정혜 삼학을 닦아서 생사해탈하는 종교는 불교밖에 없습니다.

계율을 생명같이 여기고 청정한 마음으로 수행하면 지혜가 밝아져요.

수행할 시간이 많고 많은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시간은 나를 위해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젊어서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불교의 연기법은 아주 심오한 사상입니다.

불가에서는 우주창조의 신, 조물주의 존재,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고 우주의 대진리를 체달하는 깨달음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습니다.

이를 위한 모든 과정을 통틀어도 연기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모든 법은 인연 따라 일어나고 모든 법은 인연 따라 사라진다고 했고, (아함경)에서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금생의 부부는 전생에 8천겁 인연이라야 가능하고, 9천겁 인연이면 금생에 형제간으로 태어나고 10천겁 인연이면 모자나 부녀간이라는 혈육의 인연이 되고, 한집안 식구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7천겁의 인연이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제법이 인연생이기 때문에 무자성이고, 무자성이기 때문에 거래가 없고, 거래가 없기 때문에 소득이 없고, 소득이 없기 때문에 필경 공하고, 필경 공하기 때문에 마하반야바라밀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연의 지중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무상함과 육신의 허망함을 느끼지 못하면 발심이 되지 않습니다.

간절한 생각이 안드는데 어떻게 발심이 나겠어요? 사람은 태어났으니 늙고 늙으니 병들고 병드니 죽게 됩니다.

언젠가 죽어야하는 숙명을 지닌 인생이고 일시적으로 잠깐 살다가 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은 가아(假我)입니다.

진짜 나는 우리가 깨우쳐 알아야 할 ‘본래면목’입니다.

이 마음이라는 것은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빛깔도 없습니다.

청정한 이 마음자리를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고 했어요.

함허 스님은 (금강경오가해)에서 ‘천겁을 지내도 옛이 아니고 만세를 뻗쳐도 길이 여기 있기 때문에 생멸이 원래 없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청정한 마음자리는 생멸이 없습니다만, 우리 인간은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시간이 감에 따라 죽음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부단히 살고 있으면서 시간이 감에 따라 죽음의 문턱으로 접근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생과 사는 동일 시점에서 출발하여 모순을 내포하고 있어요.

영원히 살고자 하는데 의지는 결국 죽음에 의해 단절되고 마는 것이 모순이고 이율배반이에요.

그래서 생즉사(生卽死)요 사즉생(死卽生)인 것입니다.

불교의 공부는 마음공부입니다.

마음은 상(相)이 없습니다.

마음 씀씀이에 따라 정토가 되기도 하고 고해가 되기도 하거든요.

이 마음을 닦는 것이 수심(修心)이요 마음을 기르는 것이 양심(養心)이요 마음을 쓰는 것이 용심(用心)입니다.

마음공부를 위해 우리는 세가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청정심과 감사심, 용맹심이 그것이지요.

이렇게 마음을 쓸 줄 알아야 지혜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선은 왜 해야 할까요.

강력한 정신집중의 현상이 아니면 번뇌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은 학문이 아닙니다.

논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설탕이 달고 소금이 짜다는 것은 맛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언전불급입니다.

부처님이나 역대 조사스님들이 왜 그토록 고행을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깨치고 보면 생사의 근원을 알게 되고 선악의 근본을 알게 되고 물질과 마음의 체성을 알게 되고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되기 때문이지요.

요즘엔 가톨릭 신부나 수녀들도 절에 와 참선을 배우려고 합니다.

서양의 물질문명에서 한계를 느끼고 동양의 정신문명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지요.

앞으로 인류를 구원하려면 동양의 정신문명, 그 중에서도 불교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각이 서서히 일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석학 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30여년전 일본 교토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물질의 힘과 정신적인 도덕의 부조화가 현재를 위기와 공포로 몰아 넣고 있다”면서 “이것을 해결하려면 고차원적인 종교의 힘이 아니면 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서양에서 실존철학이 나온 것도 스스로의 한계에 대한 반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기계의 노예가 되고 종속화되었기 때문에 비판적인 관점에서 본래의 나를 찾으려는 것이었지요.

실존철학은 자신을 잃고 사는 자기상실의 시대에서 벗어나 본래적인 자기로 돌아가려는 탈출구가 된 것입니다.

원공법계 제중생(願共法界 諸衆生) 자타일시 성불도(自他一時 成佛道) 원컨대 법계의 모든 중생들이 한 날 한 시에 깨닫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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