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승묘법(一乘妙法)의 진리 연꽃에 비유, 부처님의 대자비(大慈悲) 친근하게 기술
부처님 가르침 종합한 대승경전의 정수(精髓), ‘法華七喩’ 비유로 중생의 병폐 치료
옛날에 읽은 단편 중에서 “잃어버린 편지”라는 글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주인공이 매우 중요한 편지를 잃어버렸는데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그 편지를 찾아내는 대목은 참으로 싱겁고 허망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편지꽂이에 꽂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그 편지를 찾느라고 야단법석을 떨며 벽 틈, 침대시트, 비밀금고 등을 다 뒤지고도 마침내는 이 사람 저 사람을 의심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편지는 너무나 평범한 장소인 편지꽂이에서 나왔습니다. 세상일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식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서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되는 경우가 많은 현실입니다. 중요한 것일수록 평범한 곳이 가장 안전하듯이 있는 그대로의 꾸밈없는 모습이 제일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서두가 길어진 이유는 《법화경》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제법실상(諸法實相)을 설한 대표적인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통 화중지왕(花中之王), 즉 꽃 중의 꽃을 목단(牧丹)이라 하듯이, 옛날부터 경전 중의 경전이라고 하면 바로 《법화경》을 가리킵니다. 팔만사천 법문이라는 방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정수(精髓)를 한데 모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온갖 법문을 종합하여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바로 이것이다”하고 결론지은 경전이 바로 《법화경》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은 당신이 설한 수많은 가르침을 요약하여 마치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하듯이, 요새말로 시청각교육을 하듯이 참으로 알기 쉽도록 많은 비유를 들어 불법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방향제시를 해주신 경전이 바로 《법화경》입니다.
《법화경》의 정식 명칭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입니다. 이때 묘법은 범어로 삿다르마(saddharma) 즉 “미묘한 법”, “절대적 진리”라는 뜻이고 연화는 푼다리카(pundarika)인데, 부처님의 묘법을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세간의 여러 가지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꽃에다 비유한 것이지요.
그것은 연꽃이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거기에 때묻지 않고 순백의 깨끗한 꽃을 피워내듯이, 우리 중생들도 세속에 살고 있으면서 번뇌에 물들지 않고 아름답고 깨끗한 생활을 영위한다면, 반드시 성불할 수 있다는 《법화경》의 근본사상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다음 경이란 범어로 수트라(Sutra) 즉 아름다운 꽃을 꿰는 실을 말하는데 묘법을 문자화하여 엮어놓았다는 의미이지요. 따라서 《묘법연화경》하면 ‘절대적인 일승묘법(一乘妙法)의 진리를 연꽃에 비유하여 설한 경전’이라는 뜻이 됩니다.
《법화경》의 성립은 기원 후 1세기경으로 추정되고 현재 수많은 대승경전 중에서 산스크리트 원본이 제일 많이 남아있는 경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서역(西域 : 중앙아시아)을 거쳐 중국에 전래된 것은 3세기이며, 그 후로 여섯 차례나 번역되었지만 현존하는 것은 세 종류뿐입니다. 즉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과 구마라집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그리고 굴다(굴多)와 급다(급多)가 공역(共譯)한 《첨품법화경(添品法華經)》이 그것들인데, 두 번째 구마라집의 번역본이 가장 많이 독송되고 있습니다. ※ 굴다(굴多)와 급다(급多) 의 굴. 급 : 표기불가 한자
그러면 《법화경》의 구성을 설명 하도록 하겠습니다.
《법화경》은 2처(處) 3회(會) 28품(品)으로 구성되어 있고, 2처란 두 장소를 말하는데 즉 영축산과 허공이며, 3회는 법회가 두 장소에서 세 번 열렸다는 뜻입니다. 자세하게는 영산회상에서 두 번, 허공에서 한번 열렸는데 우리가 보통 ‘영산회상(靈山會上)’이니 ‘영산재(靈山齋)’니 하는 말도 여기서 유래된 것입니다.
경전의 내용은 크게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전반부는 방편품(方便品)을 중심으로 하여 일승(一乘)사상을 설명하여 표면에 드러난 각기 다른 개성 안에 내재된 평등한 불성을 보라는 의미를 가지고, 후반부는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을 중심으로 하여 구원성불(久遠成佛) 즉 부처님의 영원성을 설명하여 무량한 생명의 상징으로서의 새로운 불타관을 펼치고 있습니다.
《법화경》의 구성과 그 내용에 대해서는 대강 설명을 마치고 비유를 중심으로 설명 하겠습니다. 그러나 《법화경》에는 너무나 많은 비유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이를 모두 소개해 드릴 수는 없고, 《법화경》의 비유 중 가장 중요하고 또 흥미진진한 이야기인 ‘법화칠유(法華七喩)’ 가운데서 몇 가지만을 추려서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화택의 비유(火宅喩)’의 내용은 아버지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집에 불이 났는데 돌아와 보니 아이들은 놀이에 정신이 팔려서 바깥에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집안에서 놀고만 있었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방편을 써서 방에서 나오면 좋은 장난감을 사주겠노라고 소리를 쳐서 아이들을 겨우 밖으로 유도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때의 아버지는 물론 부처님이시고, 아이들은 위험성을 모르고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 중생이며, 불타오르는 집은 바로 이 사바세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장자궁자의 비유(窮子喩)를 보면, 어릴 때 집을 잃어버린 자식이 걸인이 되어서 우연히 아버지의 집으로 구걸을 오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첫 눈에 걸인 아이가 자기 자식임을 알아보고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자식은 자신이 도둑으로 몰리는 줄로 착각하고 놀라서 도망을 가게 됩니다.
아버지는 하인을 시켜서 그를 데려다가 허드렛일을 시키며 아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아버지는 비록 변소청소를 하는 아들이긴 하지만 매일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젖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해에는 아들을 마당청소부로 승격을 시켰지요.
이리하여 20년이 지난 후 아들이 집안의 총감독관이 되었을 때 임종을 맞이하게 된 아버지는 비로소 아들을 불러들여 그간의 사정을 들려주었습니다.그때는 아들도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전 재산을 상속받게 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부처님이시고, 걸인 아들은 바로 우리 중생임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부처님은 이렇게 미묘한 방편으로써 중생들을 최고의깨달음으로 이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내용입니다.
‘약초의 비유(藥草喩)’는 모든 중생들은 소질과 능력에 차이가 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 근기에 맞게 감로법을 설하시어 언젠가는 반드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마치 하늘에서 비가 평등하게 내리지만 초목의 크기와 종류에 따라서 빗물을 수용하는 양이 각기 다르듯이 똑같은 부처님의 가르침도 우리 범부들에게는 자신의 능력과 개성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비유입니다.
‘의주의 비유(衣珠喩)’는 어떤 가난한 사람에 대한 비유로, 어느 날 이 가난한 사람이 부자인 친구의 집에 가서 저녁대접을 받은 후, 그만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마침 친구는 급한 일이 생겨서 외출을 하게 되었는데, 나가면서 가난한 친구를 위해 아주 값비싼 보물을 잠든 친구의 주머니 속에 넣어주고 볼일을 보러 나갔습니다.
그 후 잠이 깨어난 가난한 친구는 주머니 속에 값비싼 보물이 들어있는 줄도 모른 채 하염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몇 년 후에 우연히 두 사람이 다시 만났는데, 예나 다름없이 가난한 친구의 행색을 보고 부자인 친구는 깜짝 놀랐습니다.그래서 살펴보니 자기가 옷 속에 넣어준 보물이 그대로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비유는 바로 주머니 속의 보석처럼우리 중생들에게 불성이 감추어져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의사의 비유(醫子喩)는 부처님의 생명은 불멸(不滅)이라는 것을 비유로서 나타낸 것입니다. 어떤 의사가 자식을 여러 명 두었는데 그가 여행을 떠난 사이 집에 있던 자식들이 약물을 잘못 먹고 약물중독이 되었습니다. 연락을 받은 아버지는 급히 돌아와서 해독약을 지어 주었지만 중병의 아이들은 먹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없이 아버지는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여행지에서 아버지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은 자식들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나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지어주신 약을 먹게 되고, 그들은 곧 병이 낫습니다.
멀리서 자식들의 병이 나았다는 소문을 들은 아버지가 돌아와서 부자(父子)가 기쁨으로 상봉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때 아버지는 물론 부처님이시고, 아이들은 우리 중생들입니다. 즉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것은 우리 중생들이 정신을 차려서 수행하도록 방편으로써 짐짓 열반에 드셨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법화경》에는 부처님의 대자비(大慈悲)가 아주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기술되어 있고, 특히 우리 중생들이 알아듣기 쉽게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가면서 현실감 있게 설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법화경》에 귀의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