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統攝, Consilience)은 “지식의 통합”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고자 하는 통합적 학문 이론을 말한다. 에드워드 윌슨은 학문의 미래적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19세기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이 <귀납적 과학의 철학>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consilience’개념을 부활시킨다. 여기서 ‘con’은 ‘더불어, 함께’ 라는 뜻을 지니며 ‘salire’는 ‘뛰어오르다, 뛰어넘다’의 뜻을 지닌다. 즉 ‘더불어 넘나듦’이라는 뜻을 지니는데 이것을 학문적 용어로 풀어쓴다면 “서로 다른 현상들로부터 도출되는 귀납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정연한 일관성을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통섭’의 역자인 최재천은 그의 역서에서 ‘Consilience’라는 단어와 상응하는 우리말을 찾아내는데에만 족히 1년을 넘게 고민해왔다고 말하면서 이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책의 절반을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밝히고 있다. 일반적으로 통섭은 학제간 연구 및 지식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풀이하고 있으며, <통섭>의 역자는 통섭이라는 큼지막한 제목 앞에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놓았다.
‘통섭’이라는 단어의 명확한 정의와 개념화가 불분명한 것은 그 단어가 가지는 연기적 속성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여러 학문영역 및 제반현상들은 칼로 제단하듯이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설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연기설은 부처님이 설하신 근본교설로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는 상의상관적 관계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결국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연기의 법칙’은 세상의 진리적 모습 그 자체이다. 진리 그 자체는 하나의 현상이나 모습이 아닌 일종의 법칙성이다. 물론 법칙성이라는 말도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없으며 불교의 표현을 빌리자면 ‘Dharma’라고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 통섭이라는 패러다임은 곧 불교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어떤 학문적 영역이나 지식이 통합될 수 있는 근거는 그것이 이미 연기성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범주 속에서 작용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불교는 이러한 연기적 바탕위에서 중도를 설하고 있다. 중도라는 것은 ‘양 극단에 치우지지 않은 가르침’, ‘양변을 초월한 가르침’이라고 풀이될 수 있는데,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현상을 연기적 속성에서 파악함으로써 특정한 견해에 빠지는 경직성을 범하지 않고 지혜로운 안목인 정견으로서 오히려 양변을 아우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양변을 초월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을 바라보는 입각점을 진리에 맞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 그 자체로는 어떠한 입각점을 가지지 않는 것이기에 결국 중도는 입각점이 없는 입각점, 즉 지혜의 안목을 가리킨다.
통섭을 불교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연기와 중도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지혜의 안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그의 친구인 마르셀 그로스만에게 썼던 초창기 편지에서 “직접적인 관찰로는 매우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현상들이 실제로는 통합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나는 황홀함을 느낀다오.”라고 표현한 것은 이러한 세상의 근원적 모습인 연기법칙에 관한 작은 중도적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통섭이 오늘날의 사회에서 새로운 학문적 패러다임으로 모색되고 있고, 미래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점은 2500여년 전 부처님께서 설하신 통섭적 가르침이 앞으로의 사회에서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다. 오늘날 불교학이 응용불교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심리학, 의학, 생태학 등 사회의 제분야와의 연계와 그 사회적 역할을 모색하고 있음은 그동안 망각되고 무시되어온 불교의 통섭적 성격으로의 회귀라는 성격을 지닌다.
하지만 불교의 통섭적 성격은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한 학제간의 연구, 또는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소극적 통섭의 의미를 넘어선다. 즉 연기성과 중도라는 진리에 바탕을 둔 불교적 지혜의 안목으로 이 세상의 현상적 측면들을 규명하는 대통일장 이론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중생들을 현실적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진속을 초월한 대극적 통섭인 것이다.
신경스님, 반야사, 월간반야 2010년 3월 제1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