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對論식 ‘교리문답서’
불교의 보편성과 합리성 잘 드러내
흔히 우리나라에는 토론 문화가 발달하지 못하였다고들 합니다. 사실 토론이란 우리네 한국인들의 전통적 사고방식이나 정서에서 본다면 부합되지 않은 면이 많기 때문이지요.
모든 인간관계에서 위계질서를 중시하고, 그에 따른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을 인간된 도리로 생각하는 사회에는 토론문화가 발달하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토론은 민주주의 체제에 가장 적합한 의견교환 방식입니다. 서로가 대등한 입장과 관계에서 순전히 합리적인 논리만을 가지고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갑자기 토론 이야기로 장광설을 벌리느냐고요? <밀린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이 바로 토론을 주제로 하여 설해진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밀린다왕문경>은 기원전 2세기 중엽 인도의 서북부를 통치하던 그리이스계 국왕인 매난드로스(Menandros), 즉 밀린다(Milinda)왕과 인도불교를 대표하는 고승 나가세나 (Nagasena), 즉 나선 스님과의 대론(對論)이 경전의 내용입니다. 우선 성립배경부터 살펴 보겠습니다.
<밀린다왕문경은 팔리어로는 밀린다 팡하(Milinda-pangha) 즉 '밀린다의 물음'이란 뜻인데, 한역에서는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즉 팔리어본은 '밀린다왕'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붙인 경명(經名)이고, 한역본은 '나선 스님'에게 초점을 맞춘 경명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나가세나 존자에게 불교의 제반문제를 질문하는 밀린다왕은 박트리아(Bactria)왕조시대 사람입니다. 카스트의 신분제도를 부정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주장한 불교의 특성이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그리스인들에게 민족과 신분의 차이를 초월한 인생의 깊은 예지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이 두 사람을 토론으로 이끌고, 나아가서는 <밀린다왕문경>의 성립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은 남방불교인 스리랑카에서는 삼장(三藏)에 넣지 않는데 반하여, 미얀마에서는 삼장속에 포함시켜 경전으로서의 그 권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팔리어본에는 세 종류의 이본(異本)이 있고, 한역본에는 권수가 다른 두 가지 이역본(異譯本)이 있지만, 두 경전 모두가 번역자를 알 수 없고 중국 동진시대(317~420) 번역이라는 것만 밝혀져 있습니다.
나가세나 존자에 관해서는 <밀린다왕문경>에 나오는 ‘탄생과 출가’에 대한 기록 이외에는 스님의 전기에 관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스님의 해박한 학식과 뛰어난 화술, 그리고 풍부한 비유법과 명쾌한 답변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논사였다는 점입니다.
거기에 비해 대론자인 밀린다왕은 그리스인이 써놓은 전기가 있고, 또 인도문헌에서도 그의 활동상황이 나타날 정도로 명성과 덕망을 갖춘 사람인 듯 합니다. 그의 날카로운 질문의 내용 등으로 미루어 볼때 불교뿐만 아니라 철학, 문학, 예술 등 전반에 걸쳐 폭넓게 지식을 갖춘 지성인이자 능숙한 논쟁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밀린다왕문경>에서는 두 사람의 전생인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생에 갠지스 강변에 있는 한 사원에서 각각 사미승과 비구승이었는데 그들은 청소를 하던 중에 서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답니다.
바구승으로부터 꾸중을 들은 사미승은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서원하였고, 비구승은 ‘어려운 문제는 어떤 문제든 모두 풀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발원하였답니다. 여기서 사미승은 밀린다왕으로 비구승은 바로 나가세나 존자로 태어나게 되었다고 경전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밀린다왕문경>은 기원 후 1세기경에 불교교단 내외에 제기되고 있었던, 그리고 앞으로 제기될 수 있는 교리상의 어려운 문제들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교리 문답서와도 같은 경전입니다
다시 말하면 <밀린다왕문경>은 두 사람의 질의와 응답을 통해서 그리스적인 사유방법과 불교적인 사유방법의 차이를 일목요연하게 드러내는 경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전체적 구성과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경전을 살펴보면 전체가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끝 부분에서 왕의 질문이 304가지라고 밝히고 있지만 실제로는 236가지의 질문만이 실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서장(序章)에는 당시의 이상적인 도시 샤갈라에 대한 문화를 간단히 소개하고, 곧 이어서 나가세나 존자와 밀린다왕의 만남이 실로 전생으로부터 인연이 있었음을 밝힌 후, 나가세나 존자의 탄생과 출가 동기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제2장은 3일간이나 지속되는 두 사람의 대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밀린다왕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불교에 대한 의문들이 총망라 되어 있는데 그 질문 내용이 다양하고도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제3장은 모순이 된다고 생각되는 부분만을 간추려서 존자에게 답변을 다구치는 소위 양도논법(兩刀論法)의 난문(難問)들입니다. 양도논법이란, 예를 들면 불교에서는 고정불변의 실체란 있을 수 없다는 대전제 아래 무아를 설명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누가 윤회를 하고, 또 누가 과보를 받는가 하는 점에서 ‘무아와 윤회’ 이 두 교리는 서로 모순되지 않느냐?라고 몰아세우는 식의 토론 방법을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두 이론은 절대로 양립할 수가 없고 또한 그렇다고 해서 이들 중 어느 한쪽을 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어느 쪽으로도 결정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태에 빠지는 일종의 모순 이론을 말합니다. 이러한 양도논법에 능숙했던 밀린다왕의 질문에도 나가세나 존자는 거침없이 간명하고 명쾌하게 답변하고 있습니다. 제4장은 수행자가 지켜야 할 덕목과 기타 사항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들의 대론는 바로 토론으로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가세나 존자가 밀린다왕에게 먼저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입니다. 존자는 “당신이 현자의 자격으로 대론을 하겠다면 내가 응하겠지만 만약 왕의 신분으로 임하겠다면 나는 응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도대체 왕과 현자의 차이는 무엇인가?”라고 왕이 물었지요. 나가세나 존자는 “현자(賢者)의 자격이라면 진리 앞에서 겸허해질 수가 있지만 만약 왕의 신분이라면 당신이 토론에서 졌을 때 승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밀린다왕은 현자의 자격으로 임할 것을 약속하게 됩니다. 이처럼 나가세나 존자가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분명히 말하는 점과 또한 최고 권력자임에도 불구하고 물러설 줄 아는 밀린다왕의 도량은 참으로 배워야 할 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가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왕 : 열반이란 분명있는 것입니까?
존자 : 먼저 묻겠습니다. 허공이란 있습니까?
왕 : 네 있습니다.
존자 : 그렇다면 허공을 빛이나 소리로 보여 주십시오.
왕 : 허공은 손으로 만질수도 소리로 들을 수도 없지만 허공은 있습니다.
존자 : 마찬가집니다. 허공과 같이 열반도 빛과 소리로 드러낼 수는 없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왕 : 잘 알겠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의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부파불교의 논서처럼 난해하지도 않고 또한 한 쪽에 치우치는 학파적인 성격도 없이 어디까지나 불교의 보편성과 합리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심리론·해탈론·수행론 등 부파불교에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던 분야들도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어 당시의 교리 수준을 짐작케 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알고 넘어 가야 할 것은 당시 인도에서 제일가는 논사인 세친보살이 <구사론>을 저술하면서 이 경전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만 보더라도 얼마만큼 논리적인 체계 위에서 성립된 경전인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