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 석존의 마지막 여로

삶과 죽음 넘어선 ‘불성’소개
육신은 가도 진리는 영원함을 설명

예전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유훈(遺訓)을 남기는 풍습이 많았는데, 요즘은 유훈을 남기는 일이 별로 많지 않다고 합니다.

자식을 훈계할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부끄러워서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재산만 남겨 주면 아버지의 도리를 다하였다고 여기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그러면서도 젊은이들의 생각이 빗나가고 있다고 한탄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들이 소중히 지켜 오던 가치관을 무너뜨린다고 분노하기도 하면서 이 모두가 잘못된 교육 탓이라고 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돈이 제일이라고만 가르쳐 온 부모의 책임이라고는생각하지 않는 듯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아도 우리 부처님은 참으로 위대한 교훈을 남겨 주신 분입니다. 바로 부처님의 유훈을 전하는 경전이 <열반경>입니다.

<열반경>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소승열반경>이고, 다른 하나는 <대승열반경>입니다.

<소승열반경>은 부처님의 생애와 열반, 그리고 사리분배에 이르기까지 저간의 사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반면, <대승열반경>은 부처님의 법신은 영원하다는 것과 열반에는 그 특성으로서의 네 가지 덕이 있다는 것, 그리고 중생에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불성이 있다는 교리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자세히 설하고 있습니다.

<대승열반경>의 범본 원명은 마하파리니르바나 수트라라고 하여 <소승열반경>과 경전의 이름이 동일하기 때문에 앞서 말씀드렸듯이 대·소승을 붙여서 구별하고 있습니다.

한역으로는 법현과 불타발타라 두 명의 삼장이 공역한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6권과, 북량의 담무참스님이 번역한 <대반열반경> 40권이 있는데, 이 6권본과 40권본을 혜엄스님과 혜관 스님이 비교·대조하여 재편집한 <대반열반경>36권이 있습니다.

그래서 40권본이 번역된 장소가 북쪽이므로 <북본열반경>이라 하고, 36권본의 성립된 곳이 남쪽이므로 <남본열반경>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본(大本)이외에도 부분 번역이 더 있고, 이외에 후분(後分)만을 번역한 것도 현존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절대절명의 명제 앞에서는 그 누구도 진실할 수밖에 없겠지만 부처님의 열반을 설한 경전인 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따라서 이 경전을 소의(所依)로 하는 열반종이 성립되는가하면 수많은 주석서들도 저술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찬술된 주석서로는 당나라 장안(章安)스님의 <대반열반경소>가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후대 <열반경>의 지침서가 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주석서 가운데 원효스님의 <열반경종요>와 <열반경소>가 예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대반열반경>의 구성은 6권본이 18품, 북본은 13품, 남본은 25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먼저 유명한 설산동자의 무상게(無常偈)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자신이 보살로 수행할 때의 얘기를 해 주시는데, 그게 바로 설산동자의 구도담(求道談)이지요. 즉 설산동자의 구도심을 시험하기 위해 제석천신이 나찰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 앞에 나타나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항상함이 없어서 나면 반드시 멸해지나니(諸行無常 是生滅法)”라는 구절의 게송을 외우고 다녔습니다.

설산동자는 그 게송을 듣고 나자 목마른 이가 샘을 만나듯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게송을 들려달라고 간청을 했지만, 나찰은 몹시 배가 고파서 더 이상 외울 기력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동자는 나머지 게송을 듣고 나서 자신의 몸을 먹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였지요. 이윽고 나찰로부터 “나고 죽음에 구애받지 않으면 적멸의 고요가 즐거우리라(生滅滅已 寂滅爲樂)”는 게송의 후편을 들은 설산동자는 바위에다 게송을 새긴 후, 나무 위에 올라가 나찰의 먹이가 되기 위해 뛰어 내렸습니다.

이를 본 나찰은 곧 제석천의 모습으로 변하여 떨어지는 동자를 사뿐히 받아 안고서, 반 구절의 게송을 듣기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는 동자를 찬탄해마지 않았습니다. 설산동자는 이와 같은 공덕으로 다음 생에 석가모니부처님이 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구도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열반경>의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드리자면,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불신상주설(佛身常住說)로 부처님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즉 부처님의 육신은 열반에 들었지만 깨달음으로서의 법신은 영원하여 항상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다는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름에 가려서 해를 보지 못할 때에도 여전히 태양은 존재하듯이, 중생들이 미혹하여 부처님을 보지 못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사자새끼 한 마리가 길을 잃고서 양의 젖을 먹으며 자라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양의 새끼인 줄 알았다가 어느 날 자신의 울음소리를 듣고 뭇 짐승들이 놀라 도망가는 것을 보고 자신이 사자임을 비로소 알 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지금 행동하는 모습은 중생이지만 실상은 부처라는 겁니다.마치 사자새끼가 자신이 자각을 하든 하지 못하든 사자인 것과 마찬가지로우리가 자신이 부처임을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불성을 가진 부처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듯이 열반에 드신 것은 부처님의 육신일 뿐이며, 진리로서의 부처님의 법은 항상하다는 뜻입니다.

둘째 열반사덕이란 바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즉 열반은 항상(常)하고 즐거우며(樂) 열반의 주체는 나(我)이고 진실로 청정하다는(淨)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무상한 것을 항상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삶 그 자체가 고통인 줄을 모르고 순간적인 쾌락만을 추구하여 그것이 즐거움인양 여기고 있습니다.

또한 실체가 없는 것을 ‘나’라고 착각하고, 더러운 내 육신을 깨끗한 것으로 집착하여 전도(顚倒)된 생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 바로 상락아정의 가르침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점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불교적인가 아닌가의 기준이 되는 삼법인(三法印)의 제법무아에서 ‘무아(無我)’와 열반사덕의 ‘아(我)’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아”의 차이는 마치 현명한 의사가 똑같은 약초라도 약이 될 때와 독이 될 때를 알아서 사용하듯이 중생들이 ‘나’를 실체적인 것으로 집착할 때는 ‘무아’라고 설하기도 하고, 진리로서의 ‘나’ 바로 불성으로서의 ‘나’를 설하시기도 한 것입니다.

즉 열반사덕 속의 ‘아’는 이 세상에서 불변(不變)의 것은 없다고 믿는 나, 불성이 있음을 믿는 나, 내가 바로 부처임을 믿는 나, 존재의 실상을 참구하는 나를 뜻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실유불성(悉有佛性)의 가르침입니다. 중생들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것인데, 이 말은 우리들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행동하는 모습으로 보면 중생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부처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저런 사람도 과연 불성이 있을까 하고 의아해할 정도로 야비하고 파렴치한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그에 대해서 <열반경>은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독약을 탄 우유를 재료로 써서 버터와 치즈 등을 만들었을 때, 그 제품 하나하나에다 직접 독을 넣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을 먹는 사람들은 모두 죽게 되듯이 설사 나타나는 모습은 아귀와 같고 행동은 축생이나 아수라와 같아도 그 속엔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왜 이렇게까지 불성에 집착하느냐 하면 불성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어린아이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해도 우리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 아이 앞에 펼쳐질 무한한 가능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듯이 우리들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범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생들도 하루하루를 부처님 흉내를 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원래 교육의 어원은 흉내낸다는 뜻에서 유래하듯이 조금씩이나마 흉내를 내다보면 그것은 이미 흉내가 아닌 자기 것이 되어 버리겠지요.

어떤 사람이 앞 못보는 흉내를 5분 동안 하였다면 그 사람은 적어도 5분간은 장님이 되듯이, 우리가 부처님의 행동을 자꾸 흉내내다 보면 자연히 부처님을 닮게 되고 그러다 보면 반드시 부처님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열반경>에서는 보살이 중생들에게 무량하게 일으켜야 하는 마음자세로 네 가지(四無量心)를 들고 있는데 ‘자비희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인 알프레드 애들리 박사는 자신을 찾아온 우울증 환자들에게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남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해서 하루에 한 가지씩 이 주일간만 실천하면 당신의 병은 씻은 듯이 나을 것”이라고 처방해주었다고 합니다. 그가 비록 불교에서 가르치는 자비희사를 몰랐겠지만 같은 가르침을 주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날아다니는 새는 앉는 자리가 깨끗해야 하고, 사람의 경우는 앉은 자리보다 떠난 자리가 깨끗해야 한다”고 하듯이 떠날 때를 알고, 또한 떠난 후가 깨끗하다면 분명 아름다운 일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가신 후, 우리 중생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열반경>을 통해 이와 같이 가르쳐 주신 겁니다.

<열반경>은 시간적으로 제한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생에 대한 고찰과 영원을 지향하는 중생들의 간절한 물음에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인생관을 확립시켜 줄 수 있는 경전이라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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