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금강경(金剛經) – 집착을 끊다

모든 번뇌 절단하는 지혜의 경전

부정의 논리로 철저한 '空'사상 드러내 

우리가 평소 독송하는 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독송되고 있는 경전은 단연코 《금강경》일 것입니다. 자신의 기도를 위해서도 독송을 하겠지만 특히 누군가를 마지막 보내는 의식에서는 으레 <금강경>이 독경되기 마련이지요.

망자(亡者)가 생전에 세속사(世俗事)에 쫓기어 미처 불법수행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행여나도 삼악도에 떨어질까 염려하여 남은 사람들이 마지막 가는 길에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재물에, 권력에, 육신에 집착하지 말고 완전히 자유로워지라는 뜻에서 말입니다.

<금강경>은 사물의 실상을 바르게 알고, 집착을 끊으라고 설법하신 경전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생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라는 뜻이 아니라 집착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롭게살라는 적극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한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바로 공(空)사상입니다.

공사상이란 진실한 삶의 가치에 눈 뜰 수 있도록 일깨워주려고 한 가르침인데, 도리어 ‘모든 게 헛된 것(空)이로구나’하고 거기에 집착해 버리면 이 또한 공병(空病)이 되어버리고맙니다. 그것은 마치 병을 고치기 위해 사용한 약이 부작용을 일으켜 또 다른 병을 유발하는것과같다고나 할까요.

이렇게 공사상을 설명하고 있는 <금강경>은 범본과 티베트본, 그리고 몇 가지의 한역본들이모두 현존하고 있으나, 우리들이 주로 독송하고 있는 것은 바로 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반야바라밀경》으로써, 제일 먼저 역출된 경전이기도 하지만 구마라집의 번역문장이 너무나도 수려하고 유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금강경>은 철저히 공사상을 천명하고 있으면서 단 한번도 공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게 특징입니다. 다만 역설적인 부정(否定)의 논리를 마음껏 구사하여 공사상을 환한 보름달처럼 드러내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공이란 단어도 대·소승이라는 단어도 구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강경>의 성립연대를 아직 공이라는 말이 반야사상의 핵심으로 정착되기 이전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반야경전류가 완전히 성립된 후 의도적으로 그런 단어들을 빼고 축약해서 편집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 성립연대는 어떻든간에 <금강경>은 널리 독송되고 있으며, 특히 6조 혜능대사는 바로 이<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 발심 출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달마대사 이래 홍인대사까지는 <능가경>이 전법되어 왔지만, 홍인대사가 혜능스님에게 <금강경>을 전법함으로써 선종의 흐름이 크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후 중국선승들의 어록에 금강경의 경구가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선종에서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금강’이라는 말의 뜻풀이를 해보면, 금강이란 모든 광물 가운데 가장 굳센 돌로서, 깨뜨리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강은 두 가지로 비유되고 있는데 하나는 금강석(金剛石) 소위 다이아몬드라고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금강저(金剛杵)라는 것입니다.

먼저 금강석은 원래 투명한 무색(無色)이지만 햇볕을 받으면 여러 가지 색으로 나타나지요. 이때 청색은 능히 재액을 소멸하는 것이 마치 반야가 업장을 소멸시키는 것과 같고, 황색은 반야의 무루(無漏)한 공덕에 비유되며, 적색은 지혜의 불꽃에, 백색은 능히 탁한 물을 깨끗이 정화하는 뜻에, 투명한 공색(空色)은 진공(眞空)의 이치에, 벽색(碧色)은 모든 독을 없애는 것이 마치 반야가 삼독을 제거하는 것과 같음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강저는 제석천과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지니고 다니는 일종의 무기로서, 법계를 나타내는 표상인데 일설(一說)에 의하면 금강저는 우레와 천둥을 일으키게 하는 번개를 상징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와 같이 이 두 가지는 모두 견고함과 날카로움의 상징으로써, 우리 인간들의 번뇌와 미혹한 마음의 뿌리를 능히 잘라낼 수 있는 지혜를 바로 이 금강에 비유하여 상징화한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보리유지(菩提流支)는 ‘능단(能斷)’ 즉 ‘능히 끊는다’는 의미를 붙여서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였지요. 또한 600부 <대반야경>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핵심적인 내용이 삼백송(三百頌)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일명 《삼백송반야경》이라고도 합니다.

이와 같이 ‘일체의 모든 번뇌를 완전히 절단하는 지혜의 경전’이라는 것이 바로 《금강경》이 지니는 경명(經名)이고 또한 이 경전의 대의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금강경은 600부 <대반야경>과 같이 방대하지도 않고, 260자(字)로 된 <반야심경>처럼 짧지도 않으면서 시종일관 공사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인도의 무착(無着)·세친(世親)과 같은 논사(論師)를 비롯하여 중국·한국·일본 등의 수많은 고승들이 저술한 주석서만 하여도 수백종이나 됩니다. 이는 바로 이 경전이 얼마나 많은 대중들에게 독송되고 있었는가를 입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1836년 유럽에 소개된 이후 독어, 영어, 불어로 출판이 되었고 드디어는 범본과 티베트본 및 한역본을 대조 연구하는 등 <금강경>에 대한 관심이 대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경전의 구성과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이 경전의 구성에 대해 주석서를 남기고 있는 세친은 <금강경>의 종지(宗旨)를 의심을 끊는 데 있다고 보고 그 의심의 구비를 27단(段)이라 하였고, 무착은 공덕을 이루는 데 있다고 보고 그 공덕을 이루는 과정을 18단계로 나누고 있습니다. 한편 중국의 소명태자는 <금강경>을 매우 좋아하여 매일 일과처럼 독송하였는데 내용에 따라 총32분(分)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통설에 《금강경》은 묵문현답(默問顯答)이라고 하여 질문한 대목은 숨어있고 대답한 부분만 드러나 있다고 하는데, 경문에는 도합 여섯 차례의 물음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강경>에는 유명한 사구게(四句偈)가 몇 편씩이나 들어 있습니다. 사구게란 짤막한 게송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압축하여 표현한 시구(詩句)인데 다른 경전에서도 나오고 있으나, 특히 <금강경>의 사구게는 옛날부터 널리 알려져 애송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금강경>의 대의로 알려진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 (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의 뜻을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모습은 다 허망한 것이다.
 만약 사물의 겉모습을 보고 그것이 참된 모습이 아닌 줄 알면,
 곧바로 여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령 세상사가 허망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으나 그것을 자기 자신의 일로서 실감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지요. 입으로는 하루빨리 죽어야 한다고 말하던 사람도 막상 회복 불가능의 중병에 걸리면 삶에 대한 집착이 되살아납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한 오백년이 아니라 한 오천년이라도 살고 싶은 게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내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모든 사물들을 헛된 것으로 보라고 하니까 더욱 실감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이치로는 납득이 가면서도 뼈저리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감동이 없고, 남의 일로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허망하고 헛되다고 하는 것은 세상을 허무로 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영원성에 집착하려고 하는 것을 경계하는 가르침일 뿐입니다.

사실 《금강경》에는 좋은 구절들이 너무나 많아서 어느 것 하나 감동스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저 유명한 과거의 마음, 현재의 마음, 미래의 마음은 얻을 수 없다고 하는 소위 삼세심불가득(三世心不可得)을 비롯해서 부처님은 당신의 가르침까지도 뗏목에다 비유하여 뗏목은 강을 건너기 위한 수단일 뿐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설하시는 뗏목의 비유도 있습니다. 사람을 실어다 저 언덕(彼岸)에 내려놓으면 뗏목의 역할은 다한 것인데, 강을 건너고 나서도 그 뗏목을 짊어지고 다닌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6조 혜능대사의 출가와 관련이 있는 게송도 유명합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즉,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즉, 모든 것이 공하기 때문에 집착할 필요가 없고, 또한 집착하지 않은 마음의 상태에서 마음을 작용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생색내는 마음없이 베풀라고 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 베품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령 베풀고 난 뒤에 아까워하거나 베푼만큼의 보상을 기대하는 심리는 이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요컨대 《금강경》이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 뜻은 허망한 외부세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경전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부정의 논리를 투철히 이해할 때 비로소 경전의 취지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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