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대에 마조 도일(馬祖道一 : 709-788)스님은 남악(南岳)에 육조혜능스님의 법을 이은 회양(懷讓)스님이 전법원(傳法院)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찾아가 머물면서 열심히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좌선에만 열중한 나머지 누구를 맞이하는 법이 없었는데, 회양이 왔을 때도 좌선에만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를 본 회양스님은 그가 법기(法器)임을 아시고, 하루는 벽돌을 가져와 마조의 암자 앞에서 벽돌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마조는 그러고 있는 회양의 태도가 하도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십니까?”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네.”
“벽돌을 간다고 거울이 되겠습니까?”
마조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습니다.
“그러는 넌 좌선하여 어떻게 부처가 된단 말이냐?”
한 방을 얻어맞은 마조는 갑자기 서늘해짐을 느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이 수레를 몰고 가는데, 수레가 가지 않으면 바퀴를 때려야 하겠는가, 소를 때려야 하겠는가?”
마조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회양스님은 이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좌선하고 있느냐? 아니면 앉아있는 부처의 흉내를 내고 있느냐? 만일 좌선을 배운다면 선(禪)은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구애되지 않으며, 앉아있는 부처를 배운다면 부처는 일정한 형상에 구애받지 않는다. 무주법(無住法)에 대하여 취사(取捨)를 하지 말라. 그대가 만약 좌불(坐佛)이 되고자 한다면, 너는 앉아있는 불타를 배워서 오히려 부처를 죽이는(殺佛) 죄를 범하고 있다. 좌상(坐相)에 집착해서는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느니라.”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든다.” 즉 ‘남악마전(南嶽磨塼)’의 공안은 좌선의 근본 정신을 밝힌 것으로 좌선(坐禪)할 때에는 한 물건에도 구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좌선(坐禪)할 때에 부처가 되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마치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는 것과 똑같이 한낱 쓸데없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수행의 근본이 부처를 찾고, 마음을 찾는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가 분별이고 집착이 되어서 차별상에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선정을 통해 진리를 발견해가는 것은 그러한 차별, 분별, 집착을 넘어서는 단계입니다.
인해스님 (동화사 강사) 글. 월간반야 2005년 4월 제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