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신정을 쇠고 또 구정을 쇠었다. 설을 쇠고 나면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어 연세가 올라간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린이에게 있어서는 키기 커지고 자란다는 뜻이 있지만 어른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경험이 깊어진다는 것과 함께 하늘에 떠 있는 오후의 해가 서산으로 닥아 가는 것처럼 인생 황혼이 시작된다는 뜻도 된다. 세월 가는 것이 무상을 알리는 소식인 동시에 올해 몇 살이라는 것이 내 인생의 이정표가 된다. 인생이란 하나의 도정(道程)으로서 가고 있는 방향과 얼마만큼 왔는가의 거리를 나타내는 표시가 있다. 나이가 들 때마다 사람은 이것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보고 나이 값을 하라고 할 때가 있다. ‘내가 몇 살이다’고 하는 것은 나이 값을 의식하는 것으로 이것은 내가 얼마나 인생을 바로 살고 있나 하는 자기반성일 수도 있다. 세상의 물건에 값이 있듯이 나이에 값을 붙여 놓고 제값을 하라는 것은 참으로 미묘한 말이다. 물건 값이 싸고 비싼 것이 있듯이 나이 값도 싸고 비쌀 수 있다. 사실 이 세상에 나이 값이 가장 비싼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사람의 목숨이 나이와 직결되는 것이고, 또 나이에는 나이 먹은 사람의 인생가치가 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이 값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를 제대로 알고 실천한다는 것이고 나아가 인격이 훌륭하여 남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의 값은 비싸고 할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격이 어떠한가에 따라 나이 값은 달라진다. 나이 값을 못한다고 남으로부터 무시를 당할 때 내 자존심이 무너지면서 영영 팔리지 않는 물건 신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품으로 내어 놓은 물건이 끝내 팔리지 않을 때는 상품가치를 잃고 말듯이 평생을 나이 값을 못하고 산다면 인간시장에서 상품가치를 잃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나이 값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개인이 갖고 있는 학식이나 기술적 능력이 나이 값일까? 이것이 사회활동에 유익한 기능이 되기는 하겠지만 나이 값은 아닌 것 같다. 사람에 따라서는 나이 값에 대한 견해가 다를는지 모르지만, 생각이 올바르고, 소박하고, 겸손한 인품을 나이 값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 권위적인 무게보다도 자상하고 인간미 배여 있는, 사람 마음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 같은 것, 이것을 나이 값으로 보고 싶다는 말이다.
지난 연말 인도에 가 23일간 성지 순례를 하고 왔다. 15개월간 인도에서 성지 도보순례를 하면서 불전을 연구한 호진스님의 청으로 가게 된 우리 일행은 먼저 다람살라에 가서 티베트의 고승 달라이라마를 만났다. 지난해 31일 오후에 그가 거처하는 왕궁이라 불리는 사원에 들어가 우리는 그를 친견해 법문을 듣고 대담을 나눴다.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스님인지라 그를 만나는 것 자체를 모두 기뻐하였다. 그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읽은 바 있는 나는 그의 인상을 특별히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느낀 달라이라마에 대한 인상은 너무나 소탈하고 자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온화한 표정에 사람을 성의 있게 대해 주는 것 같았다. 말씀이 무척 겸손하고 권위의식 따위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다음 날 1월 1일 새해를 맞은 아침에 그는 의외로 우리 일행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취해 왔다. 전날 말씀이 미진했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대담을 계획했던 호진 스님을 다시 만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양일에 걸쳐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되어 매우 흐뭇해하였고 남을 배려하여 주는 인품에 감동을 받았다. 평생을 수행과 나라를 위하고 세계 인류를 위해 끊임없이 법시를 베풀어 온 그는 정말 노벨 평화상 수상자다운 면모를 느끼게 했다. 그는 접견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나올 때 접견실 밖에서 우리 일행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하여 모두 그와 네 번의 악수를 하였다. 초등학교 4학년인 재근 군에게도 악수를 청하였다. 밝은 표정으로 소탈하게 사람을 대해 주는 그에게서 인간미가 풍겨짐을 모두가 느꼈다고 하였다. 소탈하고 겸손의 미덕이 몸에 베인 것 같은 인상이 달라이 라마라는 노스님을 사람들이 더 따르게 하고 존경하게 하는 것 같았다.
사람은 무심코 나이 값을 잃을 때가 많다. 잘못된 습관 같은 것이 남을 괴롭게 하거나 오만불손하여 예를 모르고 막무가내로 처신하는 것 등은 분명 나이 값을 잃는 일이다.
조선조의 명재상 황희가 정승으로 있을 때 김종서가 공조판서로 있었다. 김종서는 곧잘 거만한 태도로 안하무인격이 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의자에 앉을 때도 항상 거만하게 삐딱하게 앉아 거드름을 피웠다. 한 번은 황희가 이 모습을 보고 하급관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종서 대감이 앉아 있는 의자가 한쪽 다리가 짧은 모양이니 가져가서 고쳐다 놓으라.”
이 말을 들은 김종서가 정신이 번쩍 들어 크게 사죄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고 한다. 뒷날 김종서는 이렇게 술회했다고 전한다.
“내가 육진(六鎭)에서 여진족과 싸울 때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와도 조금도 두려운 줄 몰랐는데 그때 황희 대감의 한마디 말씀을 듣고 나도 모르게 등 뒤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樂山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2월 제9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