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강의 (6) 진성은 참으로 깊고도 미묘하다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嶶妙)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진성은 참으로 깊고도 미묘하여

자성대로 있지 않고 연을 따라 달라지나니

위의 두 구절은 연기(緣起)의 체(體)를 설명하는 말이다. 원융무애한 법성이 현상계의 차별상을 전개하는 심오한 이치는 불가사의하다. 이것은 법성을 진성(眞性)이란 말로 바꾸어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에 의해 이해하는 차원에서 설명해 보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불교 교리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연기법(緣起法)이다. 연기(緣起)라는 말은 인연에 의해 일어난다는 뜻인데, 인연의 도리는 심오하여 깨달은 경계라야 체득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화장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화엄경에 미륵보살이 손가락을 퉁겨 누각의 문을 여는 장면이 나오는 것처럼, 진성의 심오한 문이 열려야 법계에 깨달아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도 진성이 발현하여 인연을 따르는 것이요, 부처가 변하지 않는 것(不變)과 인연을 따르는 것(隨緣)의 도리가 있다. 이를 흔히 체(體)와 용(用)이라 설명한다. 본체와 본체가 일으키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일체 만법이 생성하여 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심오하고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다.

쉽게 비유하여 말한다면, 날씨가 추워지면 물은 얼어서 얼음이 되고 따뜻해지면 녹아서 다시 물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때그때의 기온의 상태에 따라 눈, 서리, 이슬, 안개, 비, 수증기, 아지랑이, 구름 등의 갖가지 형태로 변하여 달라지지만, 물의 본체 즉 H2O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본체가 작용을 일으키는 상태는 상황에 따라 무한히 달라진다. 왜 달라지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때문인데, 이것이 불가사의하고 심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왜 자성(自性)은 연(緣)을 좇느냐 할 때, 일체법은 본래 자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설잠(雪岑) 김시습도 이 구절을 그렇게 설명하였다.

“일체법은 본래 자성이 없다. 또한 모든 자성은 본래 머무름이 없다. 머무름이 없으므로 고정된 주체가 없고, 고정된 주체가 없기 때문에 연(緣)을 따르는 데 장애가 없다. 연(緣)을 따르는 데 장애가 없기 때문에 자성을 고수할 수가 없고 시방삼세(十方三世)를 이룬다. 자성이란 제법(諸法)의 상(相)이 없는 본래 청정한 본체가 그것이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현상이 인연따라 나타난다는 것은 화엄경에서 설한 핵심요지의 하나이다. 이것은 제법(諸法)의 자성이 공(空)하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어떤 현상이라도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서 연기(緣起)되지만 고정된 모습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無)을 설하고 공(空)을 설한다.

또 화엄대의를 나타내는 유명한 4구게(句揭)의 하나인 “일체법잉 자성이 없는 줄 알아 이렇게 법성을 알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성이 없음을 아는 것이 법을 통달하는 관문이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시방삼세(十方三世)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는 도리이다. 시방은 공간이고 삼세는 시간인데, 시간과 공간이 있으면 존재의 상황이 전개된다. 그러나 이 존재의 상황은 본성의 당체가 무(無)의 상황, 즉 비존재의 상황이므로 근원적인 관점에서 보면 없음의 상태가 그 모체가 되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무(無)를 천하모(天下母)라고 표현하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 가운데 일체요, 많은 가운데 하나며

하나가 곧 일체요,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

의상스님 자신의 과목설명에서는 위의 두 구절에 대해 다라니(다羅尼)의 이(理)와 용(用)을 설명하는 부분이라고 하였다. 다라니라는 말로써 이 대목을 설명하는 것은, 하나 속의 일체라는 말은 바로 다라니의 번역한 뜻인 총지(總持)의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총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서 마치 그물을 당길 적에 그물을 한 쪽 코를 당기면 전체의 그물이 당겨 오듯이, 하나를 통하여 전체를 파악하며, 또 전체는 결국 하나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이(理)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는 항상 등치(等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구절은 앞의 구절인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의 뜻을 구체적으로 보충하여 설명하는 말이 된다. 연기법에서 나타나는 모든 상대적인 현상들이 자성을 고수하지 않는 무자성의 이치에서는 모두가 하나로 회통되며, 동시에 그 속에 모든 일체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들면, 열 개의 동전이 있을 적에 한 개가 두 개를 만들고 다시 세 개와 네 개 그리고 열 개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하나 헤아릴 적에는 모두 한 개이지만, 이것들을 합치면 열 개가 되는 것이다. 한 개가 있어서 열 개를 이루니, 한 개는 곧 열 개의 대역을 하게 된다. 또한 개체적으로 보는 하나의 사물은 언제나 전체의 의미가 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동전 하나가 돈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은 동전의 열 개나 백 개가 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앞의 두 구절은 인과도리(因果道理)와 덕용자재(德用自在)를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떤 하나의 결과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하여 이루어졌을 때, 하나의 결과는 그 결과를 이룬 전체의 인연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因)과 과(果)가 함께 있으면서 인에서 과를 보고 과에서 인을 보는데, 이를 인과(因果)의 도리(道理)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에서 볼 때 이것이 곧 그것이요, 그것이 곧 이것이라고 하는 서로 상통하는 무애도리(無碍道理)가 생기는데, 이를 덕용자재문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앞의 두 구절 가운데 하나는 ‘중(中)으로, 하나는 ’즉(卽)‘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를 물결에 비유하여 이쪽의 물결이나 저쪽의 물결은 모두 동일한 물 위에서 일어난 물결이며, 동풍이 일으킨 물결과 서풍이 일으킨 물결은 그 방향과 모양은 다르지만, 어떤 한 물결은 또 다른 물결 없이는 물결일 수 없는 것이다. 동풍에 의해 일어난 물결과 서풍에 의해 일어난 물결은 바람이라는 연(緣)을 따라 생긴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홀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서로의 상대적인 관계에 의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緣起)의 도리를 응용하여 하나와 전체의 관계를 설명해 놓은 대목인 것이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6월 제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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