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은 놓고 인연은 받아들인다
수행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집착은 놓고 인연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길이며 불교의 모든 교리를 실천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인연 따라 만들어지고 인연 따라 소멸하는 인연생기의 법칙에 따라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움직이는 법칙이 바로 인연과보의 법칙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인연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내가 인연을 거스른다고 해도 그것은 거스른 것이 아니며 거스르고 싶다고 해도 거스를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 세상 유정 무정 어느 존재라도
인연의 법칙에서 예외인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앞에 펼쳐진 그 어떤 인연이라도
그것은 내가 스스로 만들었고 스스로 받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할진데 내 것이 아니라고 우겨봐야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좀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으면 좋았을 터인데 왜 하필이면 이렇게 못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을까’
하고 인연을 탓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태어날 적부터 부잣집에 태어났으면 좋았을 터인데 왜 이렇게 가난한 집에 태어나 고생하는 거야’
라고 탓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은 내 인연 따라 내 스스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모가 조금 못 났어도, 가난한 집에 태어났더라도 그 인연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남편과의 자식과의 혹은 부모님과의 인연이라든가
직장의 인연, 부부의 인연, 배움의 인연, 친구나 동료의 인연 등
지금 나의 삶의 환경들은 나에게 주어진 내 인연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 하나 조차
정확히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인연은 정확히 그 자리에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인연에 내 잣대를 가지고 온갖 좋고 싫은 분별을 일으킵니다.
좋은 인연을 만나면 애착하여 더 잡으려고 애를 쓰고
싫은 인연을 만나면 애써 버리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런 인연의 흐름이
나의 어리석은 분별심으로 인해 껄끄러워 지게 됩니다.
좋고 싫은 분별은 집착을 가져오고
그로 인해 우리는 몸과 입과 뜻으로 업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인연을 만난다는 것은
풀어야할 인연, 지금 녹여야할 업인(業因)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때가 가장 녹이기 쉬울 때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 때 거부하지 말고 바로 받아들여 섭수하여
내 안에서 녹여 내고 가꾸어 가야 할 것입니다.
인연을 만날 때가 가장 그 인연 풀기 좋을 때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거부해 버리면
또 다음 어느 생에 어떤 인연으로
다시 만날지 어찌 알겠습니까.
지금 내 앞에 닥친 그 인연을 받아들여 섭수하면 지금 그 자리에서 업을 녹일 수 있을 것이지만, 거부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면 온전히 녹이지 못한 채
더욱 커져버린 업인을 만들어 잠시 과보를 뒤로 미루게 됩니다.
인연은 한 치의 오차도 없다고 합니다.
나타나야 할 가장 정확한 그 때 내 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인연이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정확한 인연으로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라는 거지요.
법계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부처님의 나툼인 것입니다.
어찌 어리석은 우리의 잣대를 가지고
부처님의 인연을 재고 거스르겠습니까.
인연은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섭수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집착하고 애착을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존재며 경계, 조건들은
인연 따라 잠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일 뿐이지 고정된 실체가 있어 딱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인연이 화합하니 그 과보를 맺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인연과보의 법칙에 따라 결과를 받고 나면 그냥 그 인연은 다해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업에 빚대에 설명한다면
업인과보라 하여 우리의 삼업이 저지른 원인이 그 결과, 과보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업이 원인이 되어 과보를 맺고 사라지면 그만인 것이지
거기에 무슨 실체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좋은 인연이라고 애착하여 잡을 일이 아니며 싫은 인연이라고 미운 마음에 버려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체 없이 인연 따라 오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집착 없이 받아들이면 그 자리에서 녹아 없어지는 것입니다.
인연(因緣) 따라 잠시 오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아 무상(無常)하다고 하고 거기에 무슨 실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무아라 하며 무상하고 무아이므로 일체는 괴로움(苦)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연법인 까닭에 무상, 무아, 고이며
이러한 삼법인(三法印)의 특성을 가진 일체 모든 존재는 결코 집착하여 얽매일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인연법이고
그 인연법에 의해 존재하는 일체제법이
실체 없음(空)을 설하는 가르침이 삼법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연법 그 자체는 진리이니 받아들이고 인연법에 의해 존재하는 일체제법은 실체없음,
즉 공이니 그에 대한 집착은 놓고 가자는 것입니다.
집착을 놓고 인연은 받아들이는 삶은
그대로 인연법과 삼법인, 공을 실천하는 삶이 되며 진리를 드러내는 실천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인연을 받아들일 때 이전에 지어 놓았던 업인을 녹일 수 있게 되며
집착을 놓았을 때 더 이상 어리석은 업을 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집착을 놓고 인연을 받아들이는
그 밝은 실천의 자리에 본래 면목 자성부처님의 지혜를 밝게 비출 것입니다.
*법정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