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이끎이 있는지?

질문) 견성이란 무엇입니까? 스님께서는 주인공에 놓고 맡기라하시는데 그러면 주인공이 발현되어 이끄는 것을 견성이라 하는지요? 그러나 견성했다는 스님들의 행적이나 어록을 통해 보거나 또는 경전은 내면으로부터 어떤 이끔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 분들은 어째서 내면의 이끔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大行) 전에 이런말을 했었습니다. 묘가 두개 있는데 하나는 자식의 묘요. 하나는 애비의묘다. 그런데 불현듯 내가 내게 묻기를 , 애비가 자식에게로 가면 자식으로 하나가되고 자식이 애비에게로 가면 애비로 하나가 되는데 그 도리가 뭐냐? 그랬습니다. 우리가 견성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로하고 글로 써 놓기도 하지만 그것을 아무리 말로 하더라도 내마음을 증득한 것 하고는 참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스님이 경전에 대해서 가로 세로 통달을 하셨는데 그분 말씀이 현실에서 큰일에 닥치니어찌 할바를 모르겠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애비와 자식이 상봉을 했더라면 그대로 자유스러워서 걸릴 것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먼저 깨달아라.마음을 깨닫고 보면 그냥 선과 교가 둘이 아니어서 내가 짓고 싶으면 짓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뿐이다 이말입니다. 그래서 늘 너부터 발견해라. 생활속에서 일체를 다 주인공 그 놈이 하는 것이니까 다 그놈이 증명할 수 있을테니 네놈이 증명하라 하며 믿고가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까지 나를 끌고온 장본인 , 나를 예까지 진화시킨 장본인이 누구입니까? 그래서 부와 자가 상봉해야 한다. 그게 견성이다 한겁니다. 그래서 이공부는 남한테 화두를 받아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내가 태어났으니까 세상이 벌어졌고 무슨 종교가 있고 그러는 것이지, 말하자면 나부터 아는 공부이지 다른게 아닙니다. 4대성인이란 분들이 다 ‘너자신 부터 알라’ ‘너 자신을 믿어라’ 그랬지요?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아무리 많이 안다해도 나를 모른다면 다 헛 것입니다. 고로 나 하나가 문제입니다. 그러면 그 나는 고정되어 있느냐 하면 또 그게 아니지요. 내가 어느때 무엇을 할때 , 어떤 이름으로 불릴 때 ‘나’라고 하겠습니까? 때로는 아버지가 되었다가 때로는 자식이 되었다가, 또 오빠, 여보라는 이름으로 그 노릇을 하니 나는 고정된 나는 없더라,그러니까 그대로 공이더라, 내몸도 고정되게 그대로 있지않고 공해서 돌아가니 ‘나’ 라는게 없다 이겁니다. 모두들 이걸 잘 알아야 하지요 .나라는 것은 전부 공했다, 그러니 없다, 천차만별 이름 따라서 바퀴가 굴러가듯 돌아가니까 고정된 나가 없다 이 것이지요. 그래서 그 ‘나’를 버리는 게 문제입니다. 이론으로 경전으로나는 공했다더라 하고 아는 것하고 생활속에서 마음으로 증득하는 것하고는 크게 다르지요. 그러니까 수행할 때 한마음 주인공을 주장자로 삼아 모든 걸 거기다 맡겨 놓고서 나오는 대로 ,부딪치는대로 다시 놓고 또 나오면 또 놓고, 놓고 또 놓아 앞엣 것 없어지고 하다보면 전체가 포괄적인 한마음인 것을 증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들 아는게 많아서 항상 내가 붙어다닙니다. 그러나 모든 게 공해서 본래는 나라는 조건이 붙질 않습니다. 그냥 여여하게 돌아갈 뿐이지요. 엄마 아버지가 애를 생산하는데 애만 생산이 되어서 나왔어요. 애쓴 사람은 다 없어지고 말입니다. 입자와 입자가 작용을 하니까 그게 질량은 다 없어지고 에너지 광력만 나오더라 이거지요. 그러니까 나와 작용하는 것까지 다 놓아야지 내가 했다고 붙잡을 게 없습니다. 주인공에 놓으라는 것은 과녁없는 과녁을 한가운데로 쏘아 맞추라는 말입니다. 전체를 원이라면 그 중심을 꿰 뚫는게 이공부입니다. 그래서 화살을 바로 쏘아야지, 중심에서 벗어나 여기 맞추고 저기 맞추면 10년이 가도 20년이 가도 어렵습니다. 이 놈이 뭘꼬? 할게 아니라 이 놈이 다 집어먹고 다 내놓는 놈이라는걸 인정하고,믿고 들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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