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생명의 진(眞)소식

옛부터 조사스님네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구해 주소서 하는데 누가 너를 구속했더냐. 사람 사람마다 눈앞에 둥근 달이 뚜렷하다. 사람 사람마다 눈앞에 지혜의 밝은 달 이 가득해 지금 아무도 그대의 밝은 달을 빼앗아 간 적도 없고, 빼앗을 수 있는 사람도 없 다. 구름이 가릴 수도 없어 너에게는 둥근 달이 그렇게 가득하다. 그리고 너의 발 밑에는 끝 없는 향수와 함께 청풍이 불어닥치고 있다. 이 향기로운 청풍을 누가 막을 소냐. 너의 생명, 너의 앞에 이와 같은 끝없는 지혜의 둥근 달, 늘 끝없는 따뜻한 지혜와 자비의 위신력, 모든 것을 무한대로 창조시킬 수 있는 절대권능 그것이 그냥 자기한테 안겨져 있다.”

이것은 결국 반야의 눈에 의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내가 불자라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다 행스러우냐 하는 이 불자라는 믿음은 이와 같이 해서 자기의 생명에 눈뜬 자입니다. 벌떡이 며 뛰고 있는 나의 심장이 필경 이러한 무한공덕장 세계의 표현이고, 내가 사는 이 국토가 악한 사람들이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 오거나, 지옥에 가기 위해서 임시 여기 와 있는 세계 거나, 어디 좋게 가기 위해서 임시 수업하는 장소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내 땅, 이 국토, 이 만남, 이 순간 순간이 바로 끝없는 광명이 퍼지는 세계입니다.

모두가 이 땅에 살되 이 땅이 고난의 세계가 아니다. 이 땅이야말로 참으로 진리를 구현 시키고 진리로써 자기를 살고, 진리를 가지는 그 노래를, 진리를 가지는 그 기쁨을, 진리가 가지는 그 환희와, 진리가 가지는 그 용기와, 진리가 가지는 그 지혜를 내 써서 사는 세상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형제 가운데 한 분이 저한테 와서 물었습니다.

“출가수행이 옳은 수행입니까. 재가수행이 옳은 수행입니까.”

그래서 “옳은 수행, 참 수행이라는 것은 차별할 수 없는 것이지마는 차별해 서 말을 한다고 하면 재가수행이 진짜 수행이다. 출가수행은 쉽고 재가수행은 어렵다. 출가 수행은 참으로 재가수행에서의 막히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갖고 하는 길이다. 출가수행은 물에 들어가서 땅을 짚고 헤엄치는 것이고 재가수행은 깊은 데 가서 수영을 배우는 것이다. 잘못하면 빠져 죽는다. 그런 위험이 따른다. 그러니까 그만큼 재가수행이 어렵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출가다 재가다 하는 것은 결국 자기 마음의 결정과 환경조건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반야바라밀 반야의 눈에서 볼 것 같으면 사실인 즉 처처(處)가 어떠한 곳이나 자기의 진실 생명을 내어 쓰는 것이 환경조건이라는 한계 속에서 내어 쓰기 때문에 그만큼 수행력이 부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가수행은 비교적 쉽지마는 그만큼 깊이 있는 수행이 되기가 어렵고, 재가수행은 그만큼 어려워서 다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수행을 할까보냐 수행 을 한다고 뜻이나 세워 가지고 살뿐이고, 원만 바꾸지 않고 살뿐입니다. 다 이렇게 말을 합 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재가수행을 가운데서 진실한 깨달음의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 니까 같이 출가하신 스님네들만 하더라도 아주 환경 좋은 데서 수행하고 있어서는 수행력이 제대로 나오지 아니하고 오히려 재가수행과 같은 거친 환경 가운데 뛰어 나왔을 때 이제까 지 조용한 가운데 안전지대에서 수행한 것이 참 힘이 약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힘을 더 길러야 되겠다 하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진실한 수행이 거기 있다 이런 말 을 저는 합니다. 그러나 사실인즉슨 이 깨달음이라는 그것이 장차 오는 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니고, 얻어오는 것도 아니고, 바로 내가 내 생명, 내 호흡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으면 출가했다고 해서 출가에 막힘이 없고, 안일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얻었다고 하는 생각에 빠지거나, 그런 일에서도 벗어나게 되지 않겠는가 합니다.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 이 몸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이 바로 진리광명의 표 현이며, 그 진리는 밖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내 생명에 있는 생명의 참 빛의 표현이다.”

이런 입장을 참으로 알아서 우리가 보현행원을 실천하고 우리가 참으로 경사스럽고 기쁜 일에 대해서 끊임없는 자기 눈이 떠나지 아니하고 생명의 호흡대로 살아간다고 하면 재가·출가 의 걸림 없이 수행은 나날이 성장할 것입니다. 보리의 싹은 그와 같이 해서 완전히 자기표 현을 할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출가수행을 특별히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마는 비록 어렵기는 하지마는 재가수행 가운데서도 깨달음의 진리 그 생명의 물줄기가 출가수행에 조금도 다름이 없을 정도로 오히려 더 큰 것이 거기에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거기서 진리의 향기와 참 빛을 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대개 우리들 불교 믿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서 경사 스럽고 기쁜 일을 만나야 찬탄하고 찬양하는 소리가 나오지 고통에 매인 사람이 무슨 찬양 이 나오고, 찬탄이 나오고, 경사스럽고 기쁘다는 말이 나올까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반야의 눈으로 볼 때 바로 내가 부처님이고 불자인 까닭에 깨달음의 진리가 내 생명에 흐르고 있고 나를 둘러싸고 있고 모두가 부처님의 깨달음의 법문을 빼놓고 딴 게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참된 찬탄과 참된 경사스러움과 기쁨, 그것이 자기 생명에서부터 용솟음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호에서 보현행자의 서원 서분을 읽었습니다마는 그것은 결국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 이것의 뿌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 그것은 삼계 고해라고 합니다만 이 고해라고 하는 것은 껍데기 현상 물질에 매인 것이고 그 매임이 없을 때, 내가 불자다 하는 깨달음의 뿌리에 서 있을 때, 바로 이 삼계 전체가 진리광명이 충만한 세계인 것입니다. 이 런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빛을 뿌리는 자, 빛을 행하는 자, 광명으로 사는 자, 이 국 토에 광명을 충만 시키는 자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깊이 두고 자기 깊이 가운데 흐르고 있는 진리광명의 불씨에 이제까지 아! 허망한 데에 매달려 가지고, 꿈 같은 인생에 매달려 가지고 내 몸뚱이를 거기에 몰아 넣어 서 슬픔에 빠져 가지고 죽어버릴까 하고 절망으로 몰아갔던 것이로구나! 사실 그렇게 생각 하고 판단했던 밑뿌리 자리에는 일찍이 생사를 초월한 한점 밖에 가 있는데 그걸 몰랐구나. 이런 것을 알 것입니다. 반야에 이르러야 필경의 생명과 필경의 진리가 자기 가운데서 살아 있다는 것을 봐서 어떤 이론을 꾸며대는 것이 아니고 눈앞에 드러난 하나의 현실로써 진리 를 쓰게 되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겠습니다.

반야심경에 보면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이라는 대문이 나옵니다. 전도에서 벗어난다. 전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말하자면 구름 맺어져서 구름이 검으니까 이 세상이 깜깜하구나. 구름이 무지개처럼 아름다우니까 이 세상이 꿈같이 좋구나. 이러고 있다가 구름이 흩어져 버리고 나니 이 세상이 허망하구나! 이렇게 구름같이 꿈같이 매달려 살다가 구름이 흩어지고 보니까, 아니면 구름 바깥의 푸른 하늘을 보니까, 거기서 영원불변의 광명이 거기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휘둘린 생각에서 벗 어나니까, 휘둘린 생각에서 매이지 아니하니까, 그 다음에는 참된 열반의 세계가 나온다는 대문이 그것입니다.

전도된 허망한 생각을 다 떠나니까 열반을 얻는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다들 아시다시 피 모든 번뇌가 끊어진 상태, 말하자면 여기 장작이라도 이렇게 놓고 아니면 종이나 지푸라 기 바짝 마른 것을 놓고 불을 지폈는데 불을 지피니까 활활 탑니다. 타고 있는 것은 중생세 계입니다. 온갖 것이 합해져서 와글와글 돌아가며 변화해 갑니다. 이것이 타는 것입니다. 이 것이 인간세계, 범부세계죠. 이 중생세계가 다 타버려서 꺼진 상태 그러니까 탈 것도 없고 불도 없고 타고난 재도 없어요. 그러면 무엇이 남았는가? 우리가 보고 있다 없다 좋다 나쁘 다 하는 것은 다 없어요. 다 꺼진 상태, 없는 상태죠.

그냥 억지로 우리가 절대 무한이다. 완전구족한 세계다라는 말을 씁니다마는 부적절한 말 입니다. 그래서 이 열반의 경계는 그 유한의 세계, 유·무 변화의 세계, 거짓 허망의 세계 고통을 가져오는 세계, 마침내는 고통과 죽음을 가져오는 세계 이러한 것이 완전히 없어진 무한청정의 진리국토세계를 우리는 구경열반이다라고 배웠습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그런 것 입니다. 불이 타다가 훅 불어서 다 꺼진 상태입니다.

필경 이와 같이 해서 있다, 없다, 물질이다, 육체다, 세간의 고(苦)다, 악(惡)이다 하고 여 기에 감정을 가지고 우리가 희망을 걸고, 거기 다 애착을 가지고 집착해서 매달려 있을 때 는 범부세계가 구름과 같은 세계에 매달려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름의 세계의 허물 을 벗어났을 때 진리의 청정세계가 나타나니 이것은 그야말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고 절 대도 아니고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어서 열반이라고 그랬습니다. 열반이란 우리의 생각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이론이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의 구조가 바뀐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말을 하자니까 열반이라고 하고 무한청정이라고 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껍데기, 열반경계의 밖에 있는 이 변화세계에서 볼 것 같으면 공(空)이다 무 (無)다, 이렇게 말을 하지마는 변화세계, 범부세계에 눈을 두지 아니하고 깨달음 자체 바로 일체 청정한 알맹이 자체에 들어와서 열반의 주체적 입장에서 보면 유다, 무다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열반사덕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열반사덕은 열반경에 나오는 말씀인데,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말합니다. 상이라 는 것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보통 불교를 공부하면 모든 것은 허망하다, 무상이 불교라고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알다시피 물질적인 것, 감각적인 것, 눈 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 여기에 매달려 있으니까 그것은 무상한 것이다, 자꾸 변하고 흘러가는 것이다, 그것을 붙잡아 봐야 안 된다고 하는 뜻에서 무상을 설명한 것입니다.

깨달음 자체 이 열반세계에 들어와서 보면 무상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개념화할 수 없는 것이고 개념규정이 불가능한 것이지만 상(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 영원 불변 의 상입니다. 그 다음에 이 세상은 모두 고(苦)다. 범부세계, 우리가 물질에 매달리고 감각에 매달리고 있는 세계는 고입니다. 무엇이든지 필경엔 죽음으로 경계짓고 맙니다. 그렇지만 열 반 자리 이런 주체적인 생명 자리, 우리 불광의 표현에 의하면 마하반야에 의해서 완전히 드러나고 있는 바라밀의 세계, 내 생명, 국토 이것은 고가 아닙니다. 즐거울 낙(樂)자 낙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세계가 허무니 공이니 무니 하는 소리는 껍데기에서 본 말이고, 주체적 인 생명으로 살고 있는 나의 생명의 밑바닥에 흐르는 진리 그 자체 열반자리는 그것이 아닙 니다. 영원불변한 것이고 끝없는 즐거움이 충만한 것입니다. 다만 상이다, 낙이다라고 말은 하지마는 그것은 우리가 보통, 지금 우리가 감정으로 측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 무아(無我)다. 모두가 물질적인 것 인연에 따라서 몇 가지 합해 가지고 이루어 진 것이 아니냐, 어떤 것이 상호의존관계를 떠난 것이 있느냐, 전부 합해 가지고 인연의 결 합에 의해서 몇 가지 요건을 충족하여 사람도 됐고, 물건도 생기고,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 냐 그랬는데 반야의 눈에서 볼 것 같으면 그것은 화합이고, 잠시 지나가는 그림자이고 이런 걸 알아버려서 공이다 그랬습니다. 무아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열반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무아가 아니라 아(我)입니다. 불교를 무아 라고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무아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열반사덕 가운데 셋째가 아(我)입니다. 아란 바로 불성입니다.

그 다음에 이 몸뚱이는 부정한 것입니다. 아무리 닦고 아무리 향기롭게 발라보고 치장을 해봐라, 끊임없이 냄새나고 더러운 것이 흐르는 것이고 그렇게 실컷 먹여주고 떠받들어 줘 봐도 마침내는 똥은 차라리 만져도 송장은 못 만진다고 그야말로 송장되고 마는 것 아니냐, 그러니 부정(不淨)한 것이다. 그렇지만 참성품의 세계, 바라밀의 세계, 열반의 진수에 있어서 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무한청정이 끝없이 너울치는 세계, 이것이 열반의 경계다. 열반, 이 번 뇌를 벗어난 바라밀의 진(眞) 세계가 상락아정이라는 사덕이 충만한 것이다라고 이렇게 열 반경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열반이라고 하는 자리, 바라밀다라는 자리가 어느 부처님의 세계이거나 따로 있는 세계가 아니고 우리들의 참생명의 진(眞) 소식이라고 할 때 비로소 깨달은 눈과 미혹 의 눈의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깨달은 눈은 이와 같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으로 주 체적인 입장에서 낙관적으로 세계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光德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