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는 위대한 뱃사공이니 능히 생사의 바다를 건네 준다.
계는 시원한 못이니, 온갖 번뇌(煩惱)를 씻어 낸다. 계는 두려움을 없애는 술법이니 사해(邪害)의 독을 제거한다. 계는 무상(無上)의 반려(伴侶)니 험악한 길을 통과하게 한다. 계는 감로(甘露)의 문이니 성자들의 근거처(根據處)다. 그러므로 계를 수지(受持)하여 마음에 동요가 없고 전념(專念)해 포기하지 않으며 바른 계상(戒相)을 헐뜯지 않고 또 사명(邪命)의 마음이 없고 보면 이를 일러 청정한 계라고 하는 것이다.” 『승지율』
“계를 손상하는 사람은 당연히 모든 악도(惡道)의 문으로 가게 되고 계를 받들어 실천하는 사람은 당연히 온갖 선처(善處)의 문으로 가게 된다.『문수사리정율경』
뱃사공은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사람을 안전하게 건네주는 사람입니다. 물결의 사나움을 이기고 파도의 드높음을 이겨내서 바로 안전하게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데려다 주는 사람이 뱃사공이지요. 생사 파도 높은 세계를 안전하게 넘어다 주는 것이 계입니다.
그런데 계가 무엇인가.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 두고 들어가는 것이 쉽겠다고 생각됩니다.
계라고 하는 것은 청정본성, 부처님의 완전한 본래 본성이지요. 이 청정본성, 우리 모두의 청정본성, 부처님의 청정본성, 계는 청정본성의 구체적 행동덕목입니다.
청정본성은 계라고 하는 행동을 통해서 구체성을 띱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청정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행동이 계법에 의지한 청정덕목과 계합하지 않는다고 하면 아무리 청정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청정이 아니고 관념상태의 청정입니다.
계는 부처님의 청정본성의, 또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청정본성의 구체적 행동덕목이다 라고 생각해 보면 바로 계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진리, 그것의 파동, 그것의 진동, 그것의 작용, 부처님의 진리 생명의 활동방식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계법이 부처님의 진리자성의 활동방식이라고 알 때 거기에 계법은 위대한 공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뱃사공이라고 경의 말씀의 대목을 읽은 것처럼 그렇게 찬탄하고 찬탄해도 부족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라고 하는 것은 어떤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 생활, 자기 청정본성의 구체적인 행동인 까닭에 자기 본성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생명질서입니다.
만약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당연한 생명질서를 어기고 있는 것인데 왜 당연한 생명질서를 어기고 있는가. 그것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물을 마시면 갈증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물을 마십니다. 불에 가까이 가면 따뜻해져 몸을 녹일 수 있다고 알면 그 곳은 가까이 갑니다. 계법이 자기 청정본성을 드러내는 방식이고, 계법이 청정본성의 무량공덕을 나타내는 방식임을 알면 저절로 계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마는 계는 청정본성의 구체적 행동방식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해주시고 생각해주시면 그 다음의 법문에 대해서는 이해가 쉽습니다.
첫째 계는 위대한 뱃사공이니 능히 생사의 바다를 건네준다. 바로 그 본자성, 청정본성, 부처님의 공덕생명, 이것은 생사를 초월한 것입니다. 생사를 초월한 청정본성의 행동 그 행동을 그대로 행할 것 같으면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생사를 초월해서 생사바다를 건네준다. 그렇기 때문에 계를 지키는 것은 바로 생사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으니 계법은 위대한 뱃사공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계는 시원한 물이 넘치는 못이다.
계를 행하면 온갖 뜨거운 번뇌를 말끔히 씻어준다. 번뇌라고 하는 것은 본자성을 여의고 본자성을 떠나고 본자성을 어기는 데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본자성을 즉할 것 같으면, 본자성을 그대로 행하면 거기 번뇌가 있을 리 없습니다.
번뇌가 근본적으로 없기 때문에, 끊어질 번뇌조차 없기 때문에, 번뇌가 식기 때문에 여기서는 시원한 못이라는 비유를 썼던 것입니다.
시원한 물이 넘쳐나는 못과 같아서 온갖 번뇌를 말끔히 씻어주는 것입니다.
셋째, 계는 두려움을 없애는 술법이니 사해의 독을 제거한다. 무슨 마술 같은 술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두렵고 겁나는 것을 없애버리는 술법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계를 행하면 삿되고 자기 몸을 해치고 남을 해치고 세상을 해롭게 하는 그 삿되고 해롭게 하는 것들을 다 말끔히 없애서 그 독성이 없게 만듭니다. 즉 독을 제거해 줍니다.
그러니까 계법을 행하는 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 그 사회의 모든 삿된 독성을 제거해 주는 마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계법을 행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계법은 무상의 반려이니 험악한 길을 통과하게 한다.
반려라고 하는 친구입니다. 같은 길을 같이 가는 길 벗이지요.
험악한 길을 갈 때에 좋은 친구와 함께 길을 가면 마음 든든해서 잘 넘어갑니다. 그만큼 계법을 지키면 위없는 큰 위덕을 가진 친구와 같이 가는 길이 되어서 이 세상, 생사고난 험악한 세상을 항상 현안하게 안전하게 지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법이 우리의 둘도 없는 짝입니다. 반려입니다. 인생행로를 올바르게 통하고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여기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계는 감로의 문이니 성자들의 근거처다. 왜냐하면 바로 계법 거기에 모든 스님들이 근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스님들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무생사의 문, 감로의 문입니다. 바로 이 생사가 없는 도리에 성인들이 머물러 계신데 이 성인과 더불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성인과 함께 하는 안락을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계에 대한 찬탄입니다. 정말 계법에 대해서 찬탄이라고나 할까. 계법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는 크신 공덕을 참 잘 설명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됩니다. 계가 이와 같이 우리들 일상생활 가운데서 자신을 성취시키고 이웃을 성취시키고 사회를 성취시키는 근본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위덕인 것을 생각해서 계법을 가까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계는 특별한 때 특별한 사람에게만 친근한 법이 아니라 만인의 생활원리가 바로 계입니다. 다들 가지고 계시는 오계, 오계의 근원이 바로 지금 말씀드렸던 청정본자성의 구체적인 행동양태, 그 다섯가지 덕목이 오계입니다. 이 오계는 계 받을 때나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서 항상 존중하고 받들어 섬기고 받들어 행함으로써 이와 같이 위대한 뱃사공과 함께 하며, 시원한 물과 함께 하고 두려움을 없애는 술법이 되고 무상의 길벗이 되고 감로의 문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계법을 아주 가깝고 친근한 법으로 항상 섬겨서 우리 생활을 열어가는 진리의 문으로, 우리의 생활을 밝혀가는 진리의 횃불로서 이 계법을 배워서 섬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사리자의 열 가지의 신묘한 법문입니다. 계를 지키는 데 있어서의 열 가지 공능이 나와 있는데 아주 신묘합니다. 저도 토막토막 살펴봤습니다마는, 아주 신묘한 법문이어서 이 계법 법문할 때는 꼭 이것을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사리자(舍利子)여, 보살마하살에는 열 가지 청정한 계행(戒行)이 있나니, 무엇이 열인가?첫째는 보살이 모든 계행을 견지(堅持)해 깨뜨리지 않음으로써 무명(無明)의 어지럽힘을 입지 않음이다. 둘째는 계행을 견지함으로써 온갖 결점을 끊고 모든 괴로움이 나지 않게 함이다. 셋째는 계를 견지함으로써, 번뇌잡염(煩惱雜染) 따위 것들을 다 떠남이다. 넷째는 계를 지킴이 청정함으로써 항상 선법(善法)을 떠나지 않음이다. 다섯째는 온갖 계를 지킴으로써 늘 평등의 도리를 실천해 마음 내키는 대로 자재(自在)할 수 있음이다. 여섯째는 계를 견지함으로써 온갖 성자(聖者)를 비방함이 없으므로 안온(安穩)한 경지를 얻음이다. 일곱째는 계를 견지함으로써 육근(六根)을 세밀히 수호하여 망령된 작용이 일지 않게 함이다. 아홉째는 계를 견지함으로써 육근을 지켜서 처음 중간 끝의 어느 때에 있어서나 다 기능이 완성되게 함이다. 열째는 정념(正念) 중에 모든 계를 널리 지켜 남김이 없어서 다 원만하게 함이다. 보살은 이 열 가지 일을 다 완성하느니라.”『보살장정법경』
光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