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욕을 하자면 우선 잘 참아야 합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내야 할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가장 크게 참고 우리들을 용서하여 주는 분이 성현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이 잘못을 아무리 반복하더라도 성현은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우리는 그 앞에 참회하고 새로운 기원을 드리는 것입니다.
불보살님은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결코 벌주지 않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다만 우리들은 자기가 한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뿌린 씨를 거두어 들일 뿐입니다. 이 도리를 알아서 우리들은 항상 뉘우치고 굳게 참으면서 자비심으로 좋은 행동을 이어갈 때 행운의 종자는 뿌려지는 것입니다. 존중하고 칭찬하고 아름다운 말로 아름다운 씨를 뿌릴 때 그 종자는 반드시 싹이 트고 꽃이 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언제나 인욕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자비행을 끊임없이 반복해 가는 것입니다. 좋은 씨는 반드시 성장하여 좋은 결실을 가져 오지만 우리는 결코 그 결과를 바라거나 서두르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인욕하고 보시하고 자비하고 정진하되 그것은 우리의 본성대로 행하는 것이요, 결과를 바라거나 보상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바라밀 행자는 자성본분이 청정 불성인 것을 믿고 정성 기울여 최선을 다하는 수행이 있을 뿐입니다.
“만일 인욕을 닦고자 한다면 응당 먼저 교만심, 진심, 치심을 파하고 아(我)의 아소(我所)의 상(相)과 종성(種姓)의 항상한 상을 보지 않을지니라. 만약 사람이 능히 이러한 관(觀)을 한다면 마땅히 알지니, 이 사람은 능히 인욕을 닦을 것이며, 이와 같이 닦고나면 마음에 기쁨을 얻으리라. 인욕에 잘 머무르면 제일의 장엄이 되나니, 이것은 가장 뛰어난 재물이어서 세간의 보배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제법집요경 인욕품]
“항상 자기 몸 제어하기를 달리는 말 붙잡듯하고, 스스로 자기를 잘 단속하여 괴로움의 근본을 끊을 것을 생각하라.” [출요경 화품]
자성본분, 바로 내가 누구인가.
범부가 아니다. 업보중생이 아니다. 죄인이 아니다. 무능자가 아니다. 금생의 과보로서 속죄하러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은 부처님의 진리광명이 충만한 불성생명, 이것이 나 자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일을 당해서도 무슨 일을 당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하고 든든하게 자기 자신을 믿고 자기 행을 다듬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나는 이미 버린 몸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나쁜 일에 동화가 되지만, 결코 동화될 수 없는 빛나는 자성광명임을 생각한다면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거기에 휩쓸릴 수 없고 빠져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자성본분이 청정불성인 것을 믿는다는 것이 우리 불광의 가장 기본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법문할 내용은 일관되어 있습니다. 나의 청정자성본분이 불성이다 본성이 불성이다. 내가 바로 불자다. 나는 무한 공덕의 주인공이다 하는 것을 백 번이고 천번이고 다지는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해서 부처님의 진리광명이 내생명에서 항상 타오르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광명의 힘을 자기 자신 가운데서 계발하고 축적해서 그 힘을 쌓아 올리는 것이 불광수행입니다.
인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고 수모를 당하는 일이 있어서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을 우리 마음 속에서 항상 다져서 내 자성본분을 항상 지키고 나의 자성본분이 바로 불성이다 반야바라밀이다 하는 생각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다고 하면 어떤 어려움이나 거슬리는 일에도 흔들림 없이 자기를 지켜가리라고 생각됩니다.
“아가타(阿伽陀)의 한 알의 약은 능히 큰 독(毒)을 깨뜨린다. 보살의 지혜 또한 마찬가지이다. 작은 지혜의 약이 능히 끝없이 많은 번뇌의 독을 깨뜨린다.” [대집경]
아가타라고 하는 독을 푸는 약이 옛날부터 인도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약을 먹으면 비록 독한 것을 먹었다 하더라도 독한 것이 다 삭아서 독이 행세를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 아가타라는 약이 독을 해소시키는 것처럼 지혜가 일체의 어둠, 번뇌를 소멸시키고 번뇌에서 생기는 어떠한 독성도 모두 해소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가 무엇인가.
우리 불광 형제들은 항상 생각을 반야바라밀에서 놓으면 안 됩니다. 현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보고 만져지고 느껴지고 혹은 들리는 그런 현상에 집착해서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진리 원모습, 진리 그대로 반야바라밀이지요.
부처님의 광명이 충만한, 부처님의 은혜가 충만한, 대자비 신력이 충만한, 그러한 진리실상에서 부동한 것, 움직이지 않는 것, 이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이것은 반야바라밀 행자가 보는 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이 지혜냐. 현상, 보고 듣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그런 일체 현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진리실상에 부동한 것, 진리실상으로 항상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를 들면 미워할 대상이 있어서 대립감정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미워할 대상이 아니다. 나와 더불어 한 몸이다.
같은 진리광명이 충만한 부처님의 덕성을 지니고 있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때 상대방과는 미움 대립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서로 미움 대립 같은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바른손이 왼손을 잘못 건드렸거나 왼손이 바른손을 무의식 중에 건드린 것이지 실로는 한 몸을 위해서 서로를 위한 일이라고 너그러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는 현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실상에 부동한 것 이것이 참 지혜입니다.
“지혜를 닦아 의혹을 제거해야만 자기를 위해 보리를 구하는 동시에 중생을 위해 그 갈애(渴愛)의 강물에서 교량(橋梁) 구실을 해줄 수 있다.” [대승비분타리경]
지혜를 닦아서 의혹을 제거한다 하는 이 말은 진리실상이 드러나게 하는 것, 자기 마음 가운데서 진리실상이 항상 빛나게 하는 것, 대립심에서 대립을 극복하고 미움에서 미움의 감정을 극복하고 애갈심에서 애갈심을 극복하는 이것이 진리실상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에는 그러한 대립감정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극복되는 것입니다.
갈애, 목마르도록, 목이 타는 것같은 애착심, 그 애착심의 강물을 건너는 것도 이 지혜에서 건널 수 있는 것이고 또 강물을 건너가는 다리구실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가 애갈의 강물을 건너는 다리가 된다고 하는 것이 여기 부처님 말씀입니다.
반야, 현상에 걸리지 아니하고 진리실상에서 믿음을 두는 이 반야가 일체를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자비심이라고 하는데 자비라는 것도 이 진리실상인 진리생명의 체온이라고 저는 과거에 표현해 왔습니다.
바로 내가 나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 집안 가족이 바로 나와 더불어 한 몸이고, 우리 형제가 한 몸이고, 우리 이웃이 한 몸이고, 우리 겨레가 한 몸이고, 온 인류가 한 몸이고, 진리가 나와 더불어 한 몸이라는 것이 반야의 지혜이며, 이 지혜로 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이 진리에서 사는 데서부터 위대한 지혜와 힘이 나오고 이 땅에는 평화가 건설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혜 현상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진실상에 눈뜬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해탈하는 길이고 이 국토를 바로 정불국토로 만드는 기본적인 과제입니다.
“미혹(迷惑)해 지혜없는 사람은 오온(五蘊)의 겉모양에 집착하여 그 본성(本性)을 이해 못한다. 이런 사람은 부처님을 뵙지 못한다.” [화엄경]
오온은 색, 수, 상, 행, 식입니다. 현상 있는 것, 물질적인 것, 모두가 색입니다. 수는 감각, 상은 표상, 행은 의지, 식은 의식, 정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 감정적인 것, 그 모두가 오온입니다.
그런데 거기 겉모양에 집착해서는 본성을 이해 못합니다. 그 오온이라고 하는 겉모양에 집착하지 아니할 때 그것이 어떤 것인가. 반야바라밀에 의지한 사람입니다. 반야바라밀에 의지한 사람이 그 본성을 알 때 바로 부처님을 압니다. 어떻게 아는가. 본성이 부처님입니다. 내 생명이 거룩한 부처님의 생명과 더불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나는 신성하고 거룩한 사람입니다.
나의 부모님이 거룩한 사람이며 나의 집안의 어린 자녀 모두가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깊은 인간신뢰, 인간존중, 인간존엄에 대한 긍정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보는 사람은 일체에서 부처님을 보는 것입니다. 오온의 겉모양을 집착하지 말라. 이것은 반야심경에 오온개공이라고 했습니다. 반야바라밀의 눈에는 오온개공이라 그랬지요. 오온개공인 까닭에 오온을 중심으로 하는 일체장애에서부터 벗어나는 관세음보살의 위덕이 거기서 나오는 것이고, 관세음보살의 혼자의 위덕이 아니라 만인이 오온에 걸림이 없는 지혜를 쓰는 사람, 그 도리를 아는 사람, 만인이 함께 쓰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는 시를 강물처럼 쏟아놓아도 한이 없는 참 엄청난 대목입니다.
“생(生)·노(老)·사(死)가 큰 바다라면 지혜는 경쾌한 배다. 무명(無明)이 큰 어려움이라면 지혜는 밝은 등불이다. 온갖 전결(纏結)이 병이라면 지혜는 양약(良藥)이다. 번뇌(煩惱)가 가시나무 숲이라면 지혜는 날카로운 도끼다. 치애(癡愛)가 흐르는 물이라면 지혜는 교량(橋梁)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닦아야 한다.” [불본행경]
거기 전결이라 하는데 전결은 얽힌 것이라는 뜻입니다. 번뇌를 전결이라고 합니다. 전결, 즉 번뇌가 병이라면 지혜는 좋은 약이라는 설명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익히는 것을 보건대 나쁜 짓을 늘 배워서 자기가 하고 있는 행위가 착한 일인지 좋은 일인지 추한 일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는 무상(無常)의 변화하는 도리를 생각지 않은 채 일신을 지탱할 재산 모으기에만 열중하면서 “이만하면 천 년이 가도 없어지지 않고 영구히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 하니 딱한 일이다.” [출요경]
그런데 이 대목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으로서 설명이 되어 있지만 우리 국가사회에서 같이 추구하는 것, 바로 우리 국가나 우리 사회가 물량적인 물질적인 그러한 감각적인 욕망 충족의 도구를 지상가치로 알고 그 문제만 가지고 문제삼아서 추구해 나간다고 하면 그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에 있어서 어리석은 짓이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듯이 우리 사회, 국가 사회에 있어서도 인간의 물질적인 요소에서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성,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진리광명을 드러냄으로써 개인 행복과 사회에 밝음이 온다하는 그런 인식 없이 국가 사회가 물량위주의 성장을 추구하는 방향에서는 결과도 역시 좋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알고 배워가야겠습니다.
“장님은 아리따운 장식물(裝飾物)을 얻는대도 기쁨을 못 느낀다. 어리석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비록 지극히 심원한 가르침을 만난다 해도 그 어리석음이 매우 심한 까닭에 그것이 미혹에서 벗어날 진리임을 깨닫지 못해서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대종지현문본론]
한마디 말씀, 염불, 반야바라밀을 읽고 알고 있다는 것이 참 큰 힘입니다. 캄캄한 밤에 불을 가진 사람이, 어른이든, 아이이든, 노인이든, 힘이 있든 없든 밝은 불이 제일 귀한 것처럼 미혹의 세계에서는 바로 진리의 길을 열어주는 염불과 법문 한마디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고 혹은 관세음보살을 염하고 혹은 지장보살을 염하고 그밖에 불보살 명호를 염하거나 법문을 염해서 불가사의한 도움을 받는 일들을 우리들은 종종 듣습니다.
염불일구가 생사를 해결하고, 천리만리 떨어진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어서 서로 인연을 맺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불가사의한 도리입니다.
염불이라는 것이 본래 거리가 없는 것이고, 대립이 없고, 장벽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염불 한 마디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일체 장애에서부터 벗어나고 해탈의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미혹에서 벗어나 일구의 법문, 일구의 염불이라도 이웃에게 전해주고 자기 자신도 항상 반야바라밀을 염해서 자기 자신의 힘을 쌓아주는 것이 어떤 경우라도 밝음을 열어갈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비유컨대 땅 속에 온갖 보배의 곳집(倉庫)이 있어서 갖가지 진귀한 것들이 꽉 차 있는데 지혜가 뛰어나고 통찰력이 탁월한 사나이는 땅에 묻힌 물건을 다 알아서 생각대로 자유로이 꺼내다가 부모를 봉양하기도 하고 가난한 친척이 돕기도 하고 늙은이 병자 빈민을 고루 구제도 하지만, 지혜와 복덕(福德)이 없는 사람의 경우는 설사 보배의 곳집이 있는 처소에 이른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서는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까닭에 아무런 이익도 입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온갖 대보살(大菩薩)은 청정한 지혜의 눈이 있으므로 능히 여래(如來)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심원한 경지에 들어가며 능히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을 뵈오며, 능히 온작 법문(法門)에 들어가며, 능히 삼매(三昧)의 바다에 노닐며, 능히 온갖 부처님을 공양(供養)하며, 능히 바른 가르침으로 중생을 깨닫게 한다.” [화엄경]
여기 공양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만 우리들은 법공양을 함께 생각해 주시면 좋겠지요. 법공양, 공양 가운데는 법공양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법공양이 무엇인가.
부처님 말씀대로 사는 공양, 중생을 이익 하게 하는 공양, 중생을 섭수하는 공양, 중생의 고를 대신 받는 공양, 보살의 업을 버리지 않는 공양,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칠법공양)을 말합니다.
그리고 온갖 대보살들이 청정한 지혜의 눈이 있으므로 능히 여래의 불가사의하고 심호한 경지에 들어간다 했습니다.
그런데 여래의 불가사의하고 심오한 경지라는 것은 어디 골짜기가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 자기 성품 가운데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공덕의 문이 만인의 가슴속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만인의 믿음을 통해서 그 가슴의 문을 열 때 부처님의 불가사의 공덕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진리, 반야바라밀의 진리, 부처님의 절대적인 진리는 내 생명 속에 생명의 물줄기로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닙니다. 이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는 점에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칫하면 누가 만들어 주었으니 피조물이니 그런 말을 합니다마는 절대적인 자존자입니다.
우리의 생명진리 이것은 본래 있는 그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리의 강물이 쏟아져 나올 때 무한의 창조가 있게 되는 것이고, 만인이 함께한 동일자의 윤리가 있게 되는 것이고, 자비와 협동과 상이 없는 무엇이, 무한의 대자비행들이 거시서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불가사의한 위신력과 상래의 위덕이 본래 우리 생명 가운데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것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 속에 새겨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을 끊임없이 염해서 내 생명 속에 빛나는 태양을 잊지 말고 항상 흔들림 없는 힘을 길러서 진리의 공덕을 스스로 누리고, 가정에서 누리고 사회에 발휘하고 역사에 실현시키며, 우리의 국토를 진리로 구현된 국토로 가꿔가는 위대한 일을 우리 불자들이 감당해 나가야되리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불법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이런 점이 있었습니다. 불법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응어리를 풀어주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이 땅 이 시대 이 역사를 빛내는 위대한 진리가 불법에 있다는 것을, 그래서 불법에 의한 역사건설, 불법에 의한 사회건설이라는데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절에 왔던 초기에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부처님의 이 법문을 보면, 이 진리를 우리 대에 와서 그냥 이렇게 덮어놓아 둘 것인가. 경전 속에 묻어둘 것인가. 우리 몇몇 사람의 믿음 속에다 놔두고 말 것인가. 마땅히 힘을 합해서 소리를 합해서 그래서 이 진리를 이 땅 위에 실현하는 일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호법운동이 이 땅을 맑혀나가는 맑은 물줄기가 되어서 이 땅 구석구석을 맑히고 흘러갈 수 있도록 힘을 냅시다.
光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