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成道(성도)의 큰 뜻

「법화경 여래수품」에 부처님께서 진리말씀으로 보이신 바와 같이 당신께서는 일찍이 이미 이루신 부처님이십니다.

중생들을 미혹에서 건져서 어둠에서 밝은 천지에 갖다놓기 위해서 무수방편을 베푸시는 가운데 다시 세간에 탄신을 보이시고 다시 성도를 보이시고 내지 가지가지 법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성도, 이 성도의 뜻이 참으로 가슴에 벅차게 감사하고 감격스럽습니다. 음력 12월 8일, 성도절. 우리 함께 모였습니다. 서로 부처님의 이 깊은 은혜, 크신 은혜를 마음에 새기면서 크신 가르침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리 마음속에 거듭거듭 다짐합시다.

부처님 은혜를 상기하는「불은상게」에 보면 “부처님은 갈비나라에 나시에 마갈타에서 도를 이루시고 바라나에서 설법하시고 구시라에서 멸도에 드셨나니.”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마는 ‘진묵겁전 조성불(盡墨劫前 造成佛)’이라 그랬습니다. 진묵겁, 묵겁이 다했다는 뜻이지요. 묵겁이 무엇인가? 묵이란 온 대천세계만한 크기의 먹을 갈아서 먹물을 만들어서 그 먹물을 만들어서 그 먹물을 동방에 몇만리 가다가 하나씩 떨어뜨리고 또 몇천리 가서 하나씩 떨어뜨려서 그 먹물이 다한 땅. 땅덩어리 그 크기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것을 다시 가루를 내서 먼지를 만들어서 먼지의 수. 그 수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그 먼지 한 개가 한 겁이라 합니다.

겁이라 하면 반석겁이니 겨자겁이니 말을 합니다마는, 온 세계가 한번 생겼다가 완전히 없어져서 빈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쉽게 봐서 한 겁이라고 한다면, 그 먼지가루 수만큼 많은 겁, 많은 시간이지요. 그 겁을 진정겁 혹은 진묵겁이라고도 합니다. 그 진묵겁 전에 일찍이 부처님을 이루셨더라는 말씀입니다.

“위도중생 현세간(爲度衆生 現世間),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 세간에 몸을 나투시다.”

부처님의 크신 은혜를 다시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성도, 부처님께서 도 이루심을 보여주신 이 사실이 어떠한 의미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가.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성도는 그대로 온 중생의 구원의 선언입니다.

모든 중생이 어둠에서 시달리고 미혹에서 시달리고 고통에서 시달리는 이 고난에 빠진 중생들을 완전히 구원하는 대 해탈을 열어 보이는 것이 첫째의 의의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당신의 본래 원하는 바가 일체 중생을 생사고해에서 건져내고 내지 일체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완전에 이르게 하는 것이 그 뜻이어서 부처님께서 주시는 구원, 그 자비하신 구원은 시장한데 밥 한 덩이 주거나 몸 아픈데 병을 낫게 하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궁극적인 생사, 죽음의 반복, 이 늪에서부터 완전히 구출하는데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들은 때로는 몸에 건강을, 때로는 재난이 없기를, 때로는 서로가 화목해서 기쁨이 흐르기를 기원드릴 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런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생명의 입각처를 바로 세우고저 생사를 초월한, 어둠이 영영 가신 진리 생명을 회복케 해주시는 궁극적인 구원의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첫째의 뜻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 부처님의 성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대광명, 부처님의 법문은 바로 진실한 인간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실한 인간선언, 인간이 고뇌와 죽음과 불행과 재난 속에서 되풀이하며 그 고난 속에서 되풀이하는 생니 또한 반복되어서 윤회를 돌고 도는 이러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니라 그 모두에서 완전히, 훤출히 벗어난 궁극적 실존, 무한가치라는 사실을 한꺼번에 보여줍니다.

부처님의 법을 통해서 우리들은 인간, 인간이 죄짓고 죄인 죄인하며 죄인으로 불리워질 존재가 아니라는 것. 진실한 생명인 즉, 진실한 인간인즉 죄지을래야 죄지을 수 없고, 때묻을래야 때묻어지지 아니하는 그러한 청정하고 권위스러운 존재입니다. 지혜와 덕성과 능력이 무한히 함장되어 있어서 인간의 그 권위, 그 권능, 그 능력을 개발 할 때 바로 온 천지가 그대로 진리가 완전히 구현된 불국장엄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을 부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부처님은 성도 하시면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위대한, 참으로 거룩한 인간, 인간의 참모습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고난, 그 고난이 개인적인 사정에서 혹은 집단적인 사정에서 또는 사회와 내지 자연계 생태계의 부조화와 파괴 등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재난이라든가, 그 밖의 세게 인류들의 집단적인 불신을 통해서 생기는 불행이라든가 하는 그러한 고난들이 무수히 흩어져 있습니다.

이 모두는 부처님의 자비스러운 가르침. 진실한 인간선언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 모두가 건져지는 것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대립하고 다투고 투쟁하고 파괴하고 불행을 대량 생산하여 마지않는 그런 일이 떳떳한 일인 듯 힘을 모아서 다투게 하는 오늘날의 수많은 일들을 한번에 쓸어버려서 모두가 평화하고, 모두가 협동하고, 모두가 사랑하고, 모두가 크게 성취하는 그런 일을 부처님은 열어 주십니다. 성도의 두 번째 뜻은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궁극적인 진리가 바로 인간의 원 모습이요, 이 인간이라는 것이 바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지고 인식의 대상이 되는 일정한 수치 속에 파악되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 그 모두를 초월한 궁극적인 진실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깊이깊이 배워야 하겠습니다.

경에 보면 부처님이 도를 이루시고 맨 먼저 하신 말씀 몇 가지가 있습니다. “기이하다. 기이하다. 일체중생, 유정, 무정이 모두 다 여래의 지혜덕성을 구족하고 있구나.” 『화엄경』의 말씀입니다.
다음은 『무상의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딱하다 중생이여, 여래가 중생 몸 안에 있거늘 보지 못하는구나.”

바로 죄와 고난과 재난. 그 속에서 죽음을 반복할 인간으로 봤던 인간에게서 결코 때묻을 수 없고 더럽혀질 수 없는 순금, 그리고 금강석이라는 사실을 보신 것입니다.

세간 사람들은 송장으로서 썩어버려야 할 존재로 봤던 이 인간이 “실로 결코 상할 수 없고 변할 수 없고 더럽혀질 수 없는 완전무결한 절대가치다.” 하고 부처님은 보아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든 것에 대한 절대 가치 표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가치를 추구하든지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든지 그 가치의 목표와 그 가치를 발굴하는 방법, 그 모두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직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세계평화를 논의합니다. 이 평화의 문제는 그 원인이 우세한 나라가 경제적으로 우세하든지, 정치적이든지 혹은 군사적이든지, 하여튼 우세한 세력이 약한 세력 앞으로 밀려들어 거기에 대한 부정으로서 일어나는 투쟁도 있고, 민족 간의 감정의 대립으로 오는 투쟁도 있고, 또는 각자의 견해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분란도 있습니다.

수많은 요인들이 있어서 전쟁의 위험을, 파괴의 위험을, 죽음의 위험을, 일체가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어두운 구름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세계 형성이며, 우리 주변의 형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끊임없이 큰 목소리로 갖다대면서 하는 소리가 평화와 번영과 우정에 넘치는 사이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무엇인가?

힘과 힘의 대결 아니면 대립을 통한 증오심과 그것을 북돋우는 선전으로써 그것을 학문이든지 사상이든지 어떤 명목으로든지 무장화해서 서로 대립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두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실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진실을 구할 것인가?

바로 실로 있는 것,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방법론, 당위에 앞서서 항상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있는 것, 사실, 있는 사실, 근본적인 실재, 이것이 불행과 대립이 있어서 불행과 대립을 보고, 불행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서 투자하느니보다 불행하지 아니하고, 행복하고 대립하지 아니하고, 함께 어울려 있고, 서로 주고 받고 서로 돕고 살고 있는 데에 먼저 눈을 떠야합니다.

서로 원수같이 지내는 이웃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 돕고 서로 이웃이 되고, 서로 주고 받고 하는 것이 삶의 현실입니다. 우리 세계 인류 바로 그 밑바닥에는 부처님의 크신 가르침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모든 중생이 하나입니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동일생명입니다. 서로 주고 받고 함께 기뻐하고 살고 있는 것이지 대립하고 있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부처님의 진리를 통해서 가치의 기준을 찾고 가치를 실현할 방법의 원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문제뿐만 아니라, 어떤 사회적인 계층대립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가대립의 문제라든가 세계평화를 지향한 국제적인 모든 노력, 그 모두는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탕이 됩니다.

참으로 있는 것이 무엇인가?

소련, 미국, 영국, 불란서, 일본 등 세계에 백 몇 개의 나라가 있다고 그럽니다마는, 그 나라가 겉으로는 그렇게 조각조각 나 있는 것같이 보이고 서로 이해가 대립되어 있는 것 같아도 서로 함께 주고 받고 함께 한 몸에 피가 흐르듯이 손 발 머리 코 등 신체 각 부분에 흐르고 있는 피가 하나의 동일피인 것처럼 세계를 흐르고 있는 진리는 하나인 것입니다.

이 하나인 진리를 피워갈 때 나라가 번영하고 세계에 평화가 오는 것이고 개개인의 행복이 있게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한낱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음의 평화를 찾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더 나아가서 우리의 마음을 흔들리고 있는 사회조직, 사회적인 모든 체제가 문제가 됩니다.

사회적인 모든 제도나 체제가 실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참으로 있는 진리에 근거해 채택됐을 때, 바로 인간의 삶은 인간 위에 군림하고 있는 사회적인 힘이라든가 그 모두가 바로 우리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 하나하나를 키우고 돕는 방법으로 결실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가고 역사가 번영해가는 궁극적인 가치와 표준, 그것을 써 가는 방법의 원리,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가르침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가 참으로 원하는 바 평화와 번영과 그리고 뜨거운 우정을 발견하고 키워가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의 말씀 중 생각나는 것을 말씀드리면 부처님은 너무나 우리에게 자비하시고 너무나 우리와 가까우십니다.

제가 성도재 아침에 법당앞을 거닐면서 먼저 떠올렸던 생각은 부처님 은혜입니다. 걷고 있는 땅이 부처님 은혜.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은혜.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부처님 은혜. 내가 움직이고 생각하고 있는 이것이 부처님 은혜. 그 생각이 거듭거듭 났습니다.

경에도 분명히 바로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실 때 당신은 일체중생과 같은 몸을 얻는다고 그랬습니다. 백억 천억의 중생이 있으면 백억 천억의 몸을 당신은 가지시는 것입니다. 백억 천억의 중생신이 바로 백억 천억의 중생신이 아니라 여래신이라는 뜻입니다.

또 일체법의 양과 같이 갖는다고 했습니다. 인간수면을 가지고 있는 이런 인간이나, 또는 중생들뿐만 아니라 일체법 일체존재 물질적인 존재들, 그 모두 일체 법 바로 그것과 같은 양의 몸을 부처님은 성취하신다고 그랬습니다.

정각을 이루실 때 이루신다고 했습니다. 내지 허공까지도 허공과 같은 양의 몸을 이루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실 때 여래가 정각을 이룰 때 모두가 일체 중생으로 깨달음을 함께 한다는 것을 부처님은 보신다고 했습니다.

부처님, 멀리 계시지 않고 너무나 가까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끝없는 은혜와 지혜를 내시고 계십니다. 끊임없는 생명의 밝음, 그 밝음을 우리 위에 부어주고 계십니다. 성도절을 즈음해서 이 점이 더욱 새롭게 가슴에 닿는 것입니다.

성도절은 우리로 하여금, 땅에서 진흙에서 헤매는, 어둠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에게 밝은 태양과 밝은 천지를 주신 것입니다. 죽음에 신음하고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죽음이 없는 부처님의 이와 같은 가르침은 성도를 통해서 그 문을 열어 보여주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까이, 호흡보다 더 가까이 이 생명을 키워주고 계시는 부처님 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합시다.

光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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