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悟(대오)의 법칙

깨달음의 경지를 간파(看破)하는데 의리선(義理禪)과 여래선(如來禪)의 경지가 각기 조금씩 다르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이 다른가? 옛 조사의 말씀에,

하늘이 땅이요, 땅이 하늘이요, 하늘과 땅이 함께 구른다
물이 산이요, 산이 물이요, 물과 산이 다 비었다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 언제 일찍이 구른 바 있었던가?
산은 산, 물은 물, 각기 완연하여 있는 그대로가 진리로다.

天地地天天地轉 水山山水水山空
天天地地何會轉 山山水水各宛然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 년 전 토정선생(土亭先生)이 아산시장엘 나갔다. 그런데 가서 보니 살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직 소금장수 하나가 살 기미가 있어 보였다. 소금장수는 급히 소금짐을 쌓아 짊어지고 송악산으로 올라갔다.

토정선생도 그를 따라 부지런히 따라갔다. 송악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소금장수는 지게를 세워놓고 겨우 한숨을 쉬었다.

“후유 ―.”

토정선생이 물었다.

“당신은 어찌하여 여기까지 지게를 짊어지고 올라왔습니까?”하니 그는 그 대답을 하지 않고 토정선생에게 물었다.

“당신은 뭘 하는 사람인데 여기까지 따라왔소?”

“나는 음양을 점치는 사람인데 시장에 나와서 보니 살 사람은 오직 당신 한 분뿐이어서 어디로 가는가 따라와 본 것이오.”

“그렇다면 나를 쳐다보지 말고 당신 발 밑을 내려다보시오.”

돌아보니 벌써 바닷물이 발 밑에까지 올라와 있었다. 250년 전까지는 아산만이 그대로 육지였었다. 요즈음 다시 막았지만 옛날엔 물 없는 육지였다. 헌데 갑자기 일본의 구주 카고시마 ― 사구라 지마에 화산이 터지면서 우리 육지가 바다 속에 가라앉은 것이다.

그 때 가서 땅 밑을 볼 수 있는 소금장수나 토정선생 같은 사람이 되면 송악산에 올라가서 간지런 발을 한번 물에 적셔볼 필요도 있고 ―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이다. 하늘 가운데 땅 기운이 들어 있고, 땅 가운데 하늘 기운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하지 않았던가? 하늘과 땅이 한데 엉켜 이 우주를 만들었으니 이것은 ‘색즉시공’의 의리선이다.

물이 산이요, 산이 물인 사실은 아산만 사건이 잘 증명하여 주고 있다. 산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육지가 되었다. 그렇다면 산도 물도 다 공한 것이다. 거기에는 산도 있다고 할 수 없고 물도 있다고 할 수 없으니 무색무공(無色無空)의 여래선이다.

천지지천천지전이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을 말한다면, 수산산수수산공은 생멸멸이 적멸위락(生滅滅已 寂滅爲樂)한 여래의 경계다.

그러나 조사의 경계는 거기서 진일보(進一步)한다. 아무리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어 하늘과 땅이 한데 엉겨 있다 할지라도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다. 남자는 남자요, 여자는 여자이니 남녀가 한데 어울려 사랑한다 하더라도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는 법은 없다.

음양 개조를 하여 변형 수술을 하기 전에는 분명히 그 위치가 한계 지워져 있다. 그렇다면 남자는 남자노릇을 잘해야 남자요, 여자는 여자노릇을 잘하여야 여자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 산과 물이 각기 완연하여 제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이것이 조사선이다.

이렇게 깨달음의 경지를 분수를 따라 몇 가지로 규정지어 볼 수 있으나 이것은 결국 보는 자의 마음에 따라 그 경계가 각기 달리 나타날 뿐 산이나 물, 하늘, 땅은 말이 없다.

깨달은 경계가 각기 조금씩 차이가 있듯이 각종의 수행 법 또한 조금씩 다르다.

조동종은 조용히 그 호흡을 관찰하며 일체 것을 끊어 버리고 오직 그 호흡 하나로 정신통일을 해 나가기 때문에 지관타좌(只管打坐) 타성일편(打成一片)을 이룬다.

지관타좌란 오로지 한 숨결에 맡겨서 일어나는 번념(煩念)을 주저앉힌다는 말이며 타성일편은 모든 것을 똘똘 뭉쳐 하나를 형성한다는 말이다.

임제종은 간화선으로 성성적적(惺惺寂寂), 풍파를 가라앉혀 맑은 바다를 형성한다.

삼라만상이 그 안에 소소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계종은 그것을 관하는 놈, 숨결을 헤아리는 놈이 누군가 철저히 의심하여 간다. 그래서 ‘단지 모른다는 것을 알 뿐’의 시심마선(是甚禪- 이뭣고 선)이라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래서 나무할 때 나무하고 밥할 때 밥하는 사람, 불 때고 장작 패는 것이 그대로 신통이 되는 선, 이것이 조계선이다.

3초 5초 호흡을 조절하며 숨을 헤아리다가 1분 2분 나중에는 구식(口息) 마저 잊어버리고 복식호흡(腹式呼吸)을 하다가 8만 4천 털구멍으로 무식의식(無息意息)을 하게 되면 우주는 호흡 속에 타성일편,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며, ‘마른 똥 막대기’, ‘삼 서근’을 의심하다가 성성적적, 물아심경(物我心境)이 일치하면 산산수수가 각기 완연히 나타난다.

대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하고 외치고 다니다가 ‘너는 너를 아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나는 나를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듯 물이 물을 씻지 못하고 불이 불을 태우지 못하는 원리를 알아,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경계에 들어가면 곧 스스로 그 성품을 보고 이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것이니 이것이 조사선이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고 어느 것이 높고, 어느 것이 얕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각기 그의 근기를 따라 마음을 이끌어 나가다가 자기 소질에 의해서 자기 선을 개발하는 것이니 아시타비(我是他非)를 논할 필요는 없다.

崇山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