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계이야기] 2. 불투도(不偸盜) – 복덕을 지으며 살자

이제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불투도계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생다겁토록 윤회를 거듭하는 중생들은 알게 모르게 투도죄를 짓기 마련이다. 그래서 투도와 관련된 갖가지 과보를 받으며 살아간다.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가난 속에 살아야 하고, 때로는 거지처럼 한 끼의 식사를 위해 구걸을 해야 하고, 때로는 추위에 떨어야 한다.

그럼 투도죄의 과보는 결코 면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현실의 업보를 맞이하는 ‘나’의 마음가짐을 바꾸고 복덕을 쌓으며 살면 오히려 크나큰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이에 관한 한 편의 옛이야기를 음미해 보자.

중국 당나라 때 배휴(裵休)라는 유명한 정승이 있었다. 그는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것도 등이 맞붙은 기형아로 태어나자 부모가 칼로 등을 갈라 살이 많이 붙은 아이를 형으로, 살이 적게 붙은 아이를 동생으로 삼았다. 부모는 형과 동생의 이름을 ‘度’자로 짓되, 형의 이름은 ‘법도 도(度)’로 하고 동생은 ‘헤아릴 탁(度)’이라고 불렀다. 배휴는 어릴 때의 형인 배도가 장성한 다음 지은 이름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배도와 배탁은 외삼촌에게 몸을 위탁하고 있었다. 어느날 일행선사(一行禪師)라는 밀교의 고승이 집으로 찾아와서 그들 형제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외삼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저 아이들은 누구입니까?”

“저의 생질들인데 부모가 일찍 죽어 제가 키우고 있습니다.”

“저 아이들을 내보내시오.”

“왜요?”

“저 아이들의 관상을 보아하니 앞은 거지상이요 뒤는 거적대기상입니다. 워낙 복이 없어 거지가 되지 않을 수 없고, 그냥 놓아두면 저 아이들로 말미암아 이웃이 가난해집니다. 그리고 저 아이들이 얻어먹는 신세가 되려면 이 집부터 망해야 하니, 애당초 그렇게 되기 전에 내보내십시오.”

“그렇지만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어떻게 내보냅니까?”

“사람은 자기의 복대로 살아야 하는 법! 마침내 이집이 망한다면 저 애들의 업은 더욱 깊어질 것이오.”

방문 밖에서 외삼촌과 일행선사의 대화를 엿들은 배도는 선사가 돌아간 되 외삼촌께 말하였다.

“외삼촌, 저희 형제는 이 집을 떠나려고 합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가다니? 도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말이냐?”

“아까 일행선사님과 나눈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형제가 빌어먹을 팔자라면 일찍 빌어먹을 일이지, 와삼촌 집안까지 망하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떠나겠습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자꾸만 만류하는 외삼촌을 뿌리치고 배탁과 함께 집을 나온 배도는 거지가 되어 하루하루를 구걸하며 살았다. 어느날 형제는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였다.

“우리가 이렇게 산다면,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의 혼령도 편안하지가 못할 것이다. 산으로 들어가서 숯이나 구워 팔면서 공부도 하고 무술도 익히자.”

그들은 산속에 들어가 숯을 구웠고, 틈틈이 글읽기를 하고 검술도 익혔다. 그리고 넉넉하게 구워 남은 숯들을 다발 다발 묶어 단정한 글씨로 쓴 편지와 함께 집집마다 나누어주었다.

“이 숯은 저희들이 정성을 들여 구운 것입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마음놓고 쓰십시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이렇게 꾸준히 숯을 보시하자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하던 마을 사람들도 감사하게 생각하였고, 마침내 숯이 도착할 시간이면 ‘양식을 보태라’며 쌀을 대문밖에 내어놓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들 형제는 먹을 만큼 이상의 양식을 절대로 가져가지 않았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침내 두 형제에 대한 소문은 온 고을로 퍼져나갔고, 그 소문을 듣고 외삼촌이 찾아와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집으로 들어가자.’고 간청하였다. 그들이 집에 이르자 때마침 일행선사도 오셨는데, 배도를 보더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얘야, 너 정승이 되겠구나.”

“스님, 언제는 저희 형제더러 빌어먹겠다고 하시더니, 오늘은 어찌 정승이 되겠다고 하십니까? 거짓말 마시오.”

“전날에는 너의 얼굴에 거지 팔자가 가득 붙었더니, 오늘은 정승의 심상(心相)이 보이는구나. 그동안 무슨 일을 하였느냐?”

배도와 배탁이 그동안의 일을 자세히 말씀드리자 일행선사는 무릎을 치면서 기뻐하였다.

“그러면 그렇지! 너희들의 마음가짐이 거지 팔자를 정승 팔자로 바꾸어 놓았구나.”

그 뒤 참으로 배도는 정승이 되었고, 동생 배탁은 대장군의 벼슬을 마다하고 황하강의 뱃사공이 되어 오가는 사람을 건네주며 고매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불자들은 지난 생의 투도죄에 대한 과보를 녹이고 복된 삶을 이루는 방법을 능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불행한 삶을 행복한 삶으로 바꾸는 두 가지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주위를 원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이상은 업이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업의 결박만 더욱 조여들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윤회와 인과를 철저히 믿고 내가 지은 업을 내가 기꺼이 받겠다는 자세로 살아간다면, 틀림없이 고통을 벗어나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과거에 맺은 업을 푸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업을 만들게 된다. 바로 이 순간 맺힌 업을 풀고 업을 더욱 원만하게 회향(廻向)할 수도 있고 반대로 새로운 악업을 맺어 더 나쁜 상태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맺느냐? 푸느냐? 이는 오직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상대적인 감정과 자존심으로 해결하려하면 매듭만 늘어날 뿐이다.

욕심을 비우고 기꺼이 받아라. 기꺼이 받고자 할 때 모든 것을 풀린다. 매사에 한 생각을 바르게 가져 맺힌 것을 풀어 나가고, 푼 것을 더욱 좋은 인연으로 가꾸어야 한다.

참된 삶, 복된 삶! 그것은 기꺼이 받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 업은 내가 기꺼이 받을 뿐 가까운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자세로 살았던 배도와 배탁 형제의 마음가짐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나아가 배도와 배탁 형제는 자신들의 가난 속에서도 가난한 이웃을 돕는 선행을 베풀었다. 꾸준히 숯을 보시하며 살았던 것이다. 이것이 거지 팔자를 정승 팔자로 바꾸어 놓았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보시를 하는 그 마음 자체가 바로 도심(道心)이요, 우리를 잘 살게 만들어 주는 선공덕(善功德)이 되기 때문이다.

정녕 이러한 복덕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거늘 어찌 탐욕에 빠져 투도의 죄를 저지르며 살 것인가?

우리 모두 가진 재물로써 능력껏 베풀어보자. 가진 것을 베풀 때 인색한 마음은 저절로 사라진다. 탐하는 마음과 더불어 인색한 마음이 사라지므로 정신은 맑아지고, 재물로써 남을 살렸으니 마음 가득 환희가 넘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 앞에 그릇되게 뚫려 있던 탐욕의 길, 투쟁의 길, 삿된 길들은 저절로 사라지게 되고, 지옥·아귀 등의 추한 세계도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불자들이여, 부디 잘 명심하기 바란다. 불투도를 계율로 제정한 까닭이 현실의 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능력껏 잘 베풀어, 복덕을 이루는 데 있고 행복한 삶을 이루는 데 있다는 것을…….

“투도하지 아니하고 복덕을 이루리다.”

가끔씩 마음 속으로 염하며 살기를 축원해본다.

日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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