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재시(財施)이다. 물질로써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 헐벗은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이다. 물론 노동을 통해 도와주는 것도 이 재물보시에 포함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맹상군이라는 제후가 살고 있었다. 권세도 높고 재물도 많은 맹상군은 어느해 생일날, 호화판의 잔치를 베풀었다.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음식을 차렸고, 아름다운 풍악소리에 맞추어 미희들은 춤을 추었으며, 손님들이 가져온 선물들은 몇 개의 방에 차고도 남았다. 맹상군은 유쾌하여 술잔을 놓이 들고 말했다.
“좋다. 정말 좋구나. 이렇게 좋은 날, 나를 슬프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를 슬프게 할 자가 있다면 후한 상을 내리리라.”
그때 눈먼 장님 한 사람이 앵금을 들고 맹상군 앞으로 다가섰다.
“비록 재주는 없으나 제가 대감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도록 해보겠습니다.”
“좋다. 한번 해보아라. 재주껏 나를 슬프게 만들어 보아라.”
장님은 앵금을 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천상의 소리처럼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하다가 좀 지나자 지옥의 고통섞인 소리를 만들어 내었고, 연이어 애간장을 녹이는 듯, 창자를 끊는 듯한 연주를 계속하였다. 모두가 앵금의 소리에 넋을 잃을 즈음, 장님은 기가 막힌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나니
세상의 모든 일 뜬구름과 같구나
무덤을 만들고 사람들이 흩어진 후
적적한 산속에 달은 황혼이어라
노래가 끝나는 순간 장님이 앵금을 세게 퉁기자 줄이 탁 끊어졌고, 앵금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맹상군은 통곡을 했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날 이후 맹상군은 자기집에 큰 식당을 만들어놓고, 아침마다 국밥을 끓여 3천 명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그 국밥은 누구든지 와서 먹을 수 있었으며, 3천 명의 식객이 먹는 소리는 20리 밖에까지 들렸다고 한다.
장님의 노랫소리에 인생의 실체를 깨달은 맹상군은 자신의 재물을 풀었다. 굶주린 이들을 위해 매일같이 3천 그릇의 국밥을 만들었던 것이다.
비록 우리가 맹상군처럼은 못할지라도 베푸는 일에는 익숙해져야 한다. 베풀 것이 있을 때 베풀어여 한다. ‘돈을 많이 모은 다음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미룰 일이 아니다. 조금 있으면 조금 있는 대로 보시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보시를 하는 그 마음 자체가 바로 도심이요, 우리를 잘 살게 만들어주는 선공덕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가진 재물로써 능력껏 베풀어 보자. 가진 것을 베풀 때 인색한 마음은 저절로 사라진다. 탐하는 마음과 더불어 인색한 마음이 사라지므로 정신은 맑아지고, 재물로써 남을 살렸으니 마음 가득 환희가 넘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 앞에 그릇되게 뚫려 있던 탐욕의 길, 투쟁의 길, 삿된 길들은 저절로 사라지게 되고, 지옥, 아귀등의 추한 세계도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부디 도로써 돈을 써보라. 틀림없이 좋은 일이 다가오고 좋은 세상이 열리게 된다.
두번째 보시는 법시(法施)이다. 흔히 법보시라고 칭하는 법시는 사람들이 온전한 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진리를 베풀어주는 것이다. 곧 재물을 보시하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재물을 보시할 수 있는 근본정신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원조를 받아왔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적인 보시에 대해 ‘우리의 정신을 미국에 팔아온 것이 아니냐’ 하는 일부 의식있는 사람들의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정녕 우리가 우리의 속알맹이인 정신은 잃어버리고 물질적인 풍요에만 만족한다면, 그것이 개인이 되었든 국가가 되었든 결과는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서도 정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요즘 시중에서는 하나에 수십만원 하는 속옷, 수천만원짜리 가구가 잘 팔려나간다고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일려주는 것인가?
자기 정신을 팔아먹고 분수를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이 이 땅에 많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때가 문제이다. 바로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 모두가 올바른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법보시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다운 법보시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금강경>에는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 보시하는 것보다 금강경 사구게 한 구절을 일러주는 것이 낫다.”고 한 구절이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금강경>을 외워서 줄줄 읊어주는 것이 복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 내용을 깨닫도록 일러주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내용을 깊이 깨달아야 복이 되는 것이고, 그 참뜻을 이해시켜야 진짜 그 사람의 복이 되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금강경> 사구게 중에는 “모양이 있는 것이 다 허망하다.”는 구절이 있다. 그렇다면 그 구절을 들려준다고 하여 누구나 무상함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도 무상을 절감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구절을 설할 때는 모양 있는 모든 것이 진정으로 허망하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허망한 것을 깨우치되 팔순 할머니와 스무살 처녀를 같이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쪽은 예쁘고 저쪽은 밉다는 차별심만 있으면 말로만 허망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확증을 심어줄 수만 있다면 <금강경>의 말씀대로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한 것보다 더 많은 복을 짓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복 짓는 일 중에서 깨달음을 얻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 복보다 더 큰 복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위 사람들에게 성심성의를 다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여, 그들의 참 정신을 일깨워주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고 아는 것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능력껏 불교책을 법보시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책을 법보시할 때는 꼭 불경이 아니라도 좋다. 오히려 어려운 불경보다는 읽어서 진리를 분명히 깨우칠 수 있고 정신을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쉬운 불교책이나 글을 법보시하는 것이 더 좋을 경우도 있다.
참되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는 책, 마음의 눈을 열어줄 수 있는 글을 가깝고 먼 사람에게 두루 공양한다면, 그 공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세번째 보시는 무외시(無畏施)이다.
무외시는 모든 두려움을 제거하여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는 보시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어린아이가 권투도 잘하고 기운도 센 자기 형과 함께 다니면 어디를 가든지 겁날 것이 하나도 없고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과 같다. 혼자 있을 때는 싸움은 커녕 도망가기 바쁘던 아이도, 든든한 형과 같이 있으면 자기보다 힘센 친구에게 얼마든지 당당해질 수 있고 깡패들이 몰려와도 힘을 딱 주고 버틸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외시이다. 든든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두려울 게 없는 것이다. 나아가 마음의 안심입명을 완전히 얻은 사람은 죽음에 임해서도 두려움이 없다. 이렇게 생사의 두려움까지도 다 해탈시켜주면 그것이 바로 최강의 무외시인 것이다.
나아가 성현의 가피를 입는 것도 무외시에 속한다. 만약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께서 나를 지켜주고 계신다는 확실한 믿음만 있으면, 그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는 무외의 경계에 들어선 사람이라 할 수가 있다.
만약 부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관세음보살이 내 뒤를 바짝 따라다니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총알이 빗방울처럼 날리는 전쟁터에 나가도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일제 때 김석원(1893-1978)이라는 장군은 매일 관세음보살 몽수경을 지극한 마음으로 불렀다. 그런데 1937년의 중일전쟁에 참가한 장군은 산서성 전투에서 가슴에 총탄을 맞고 그자리에서 쓰러졌다.
당연히 죽었어야 할 그였지만, 놀랍게도 정신을 차려 일어나보니 다친 데가 하나도 없이 멀쩡했다. 이상히 여겨 자세히 살펴보니 가슴에 넣고 다닌 관세음보살 호신불에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러한 기적이 모두 관세음보살의 보살핌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장군은, 그뒤부터 하루에 관세음보살을 만번씩 불렀다. 사무를 보면서도 관세음보살, 전쟁터에서도 관세음보살을 불러, 잠시도 입에서 관세음보살을 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깊은 믿음이 생기면 두려울 것이 없어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무외시이다.
아무것도 아닌 듯한 무외시. 그러나 곰곰히 따져보면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야말로 최상의 보시이고 가장 복을 잘 짓는 일이다. 우리 모두 주위 사람들에게 이와같은 무외의 보시를 즐겨 베풀어 보자.
누군가에게 어려운 일이 닥쳐서 ‘아이구 이걸 어떻게 하나’ 할 때 ‘어떻게 하긴 무엇을 어떻게 해. 용기를 잃지 않으면 할 수 있어.’ 하면서 안심시켜주고, ‘이러다가 내가 죽는 게 아닐까’ 할 때 ‘그런 염려 말아. 부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잖아!’ 하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도록 하여야 한다.
무외시는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이 드는 것도 아니다. 오직 우리가 하고자 마음만 내면 할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의 축원과 함께 따뜻한 마음으로 무외의 보시를 베푸는 습관을 길러보라.
주위가 온통 훈훈한 복밭으로 바뀔 것이다.
日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