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해탈(三界解脫) II

구해탈(俱解脫)

우리 공부가 이제 시작하자마자 그냥 공부가 탁 틔어서 삼계(三界)를 마구 뛰어넘으면 좋겠습니다마는 실은, 그렇게 쉽게는 안됩니다. 업장(業障), 이것이 굉장히 끈기가 있어놔서 잘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보면 짐작이 안 됩니까, 이것저것 다 뿌리치고 우리같이 스님네가 되어도 역시 망상(妄想)은 자꾸만 일어납니다. 하물며 일상생활에 계시는 분들은 망상을 떼기가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성불까지 가는 길목을 잘 모르면은 그때는 헤맵니다. 가사, 안성에서 서울 가는데 서울도 미처 못가서, 잘 못 알아 가지고 서울이라 하면 그때는 큰 탈입니다.

근래에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불(成佛)의 지위, 견성오도(見性悟道)의 지위도 미처 못 가 놓고서 그냥 길목을 잘못 알기 때문에 ‘내가 지금 견성했다, 내가 도인이 되었다’ 고 함부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도 허물을 범하는 것이고 또 많은 중생을 사기(詐欺)하는 것입니다.

불경(佛經)을 보면, 사기 가운데서 가장 큰 사기가 무엇인고하면, 진리의 사기입니다. 진리의 사기가 제일 무서운 사기입니다. 만일, 우리 출가한 스님네가 미처 도(道)를 모르면서 알았다고 하면 그 죄가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그때는 승복(僧服)을 빼앗기고 쫓겨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세(近世)에는 그런 예가 허다히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것은 우리 범부가 성불까지 가는 길목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길목을 몰라가지고 헤맨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현대와 같이 참다운 도인들이 없는, 없다고 하면 어폐(語弊)입니다만, 참다운 도인이 있을까 말까 하는 그런 희소(稀少)한 때에 있어서는 길목을 잘 몰라서 헤매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 경전 따라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해탈(解脫)이라, 우리 목적은 해탈인데, 해탈 가운데는 혜해탈(慧解脫) 또는 정해탈(定解脫)이 있습니다.

혜해탈은 그냥 이치(理致)로만, 비록 자기가 체험(體驗)은 미처 못했지만 이치로는 ‘본래 부처다’ ‘본래 부처니까 일체 번뇌가 없고 일체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다’ 고 믿고 아는 것입니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안 나오셨으면 우리가 모르겠습니다마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뒤의 무수한 도인들 덕택으로 해서, 내가 지금 체험해서 부처는 못 되어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면, ‘본래 부처다’ ‘본래 부처니까 나한테는 일체 공덕이 다 갖추어 있다’ ‘석가모니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다’ 또는 ‘천지우주는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와 같이 딱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혜해탈입니다.

혜해탈(慧解脫)도 역시 의심쩍은 사람들, 의심이 많은 사람들,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좀체로 납득이 안 갑니다. 그러나,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다시 말하면, 마음이 불성(佛性)과 거리가 별로 안 먼 사람들은 척 느끼는 것입니다.

평생에 불경(佛經)만 보고 강사(講師)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업장이 무거운 분들은 혜해탈을 잘 못 합니다. 그러니까 불경해석을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선도 하고 염불도 많이 하신 분들은 별로 학문을 많이 안 배웠다 하더라도 그냥 척 들으면 ‘아 그렇구나’ 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지금 부처는 못되었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을 거짓말이 아니고 또, 도인들 말씀은 부처님 말씀을 다 증명한 말씀인지라, 거기에 의지하면 본래 부처다’ ‘본래 부처니까 비록 내가 지금 범부라 하더라도 나한테는 일체 공덕이 다 갖추어 있다’ 이렇게 딱 믿고, ‘천지우주는 부처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가지도 버릴 것이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나 부정적인 사태(事態)를 보면 ‘저것은 못쓴다’하고 그것을 제거(除去)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바로 보면은 천지우주는 가사, 개미 새끼 한 마리만 없어도 그때는 부처가 못되는 것입니다. 징그러운 독사 한 마리만 없어도 그때는 부처가 못되는 것입니다. 징그러운 독사 한 마리만 없어도 그때는 부처가 못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 가지도, 모두가 다 부처 밖에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다만 어두워서 자꾸만 구분을 세우는 것입니다.

죄(罪)는 무엇인가?

천지가 오직 하나의 부처뿐인 것인데 둘로 보고 셋으로 보는 그것이 죄입니다. 그것이 죄의 근원(根源)입니다.

우리는 일승적(一乘的)으로, 대승적(大乘的)으로 문제를 판단해야 합니다. 방금 말씀마따나, 바로 보면 천지우주는 하나의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부처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이 바로 못 보니까 둘로 셋으로 구분하고, 이원적(二元的), 삼원적(三元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을 최파(催破)하고서 ‘오직 천지우주는 하나의 부처뿐이구나’ ‘내 자성(自性)은 부처구나’ ‘내 자성 가운데는 일체 공덕이 다 갖추어 있구나’ 이렇게 딱 믿으면 그것이 혜해탈(慧解脫)입니다.

공부를 이렇게 하고 들어가야 공부가 빠릅니다. 그래야 참선(參禪)입니다. 우리가 주문을 하든 하느님을 부르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 부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 자세가 혜해탈(慧解脫)이 되면 그때는 참선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슬람교인이 되어서 알라신을 부를망정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 마음자세가 ‘내 마음 본바탕이 절대적인 부처고, 천지 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딱 믿으면 그것이 벌써 참선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화두(話頭) 아니면 참선이 아니다 또는 묵조(默照) 아니면 참선 아니다’ 고 하는 것은 너무나 협소(狹小)한 마음인 것입니다.

오직 문제는 마음자세가, 마음이 불심(佛心)을 안 떠나면 그때는 참선인 것입니다. ‘나무묘우호우렌게교’를 부르건 무엇을 부르건 그때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먼저 혜해탈이 딱 된 뒤에는, 비록 내가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당하(當下) 부처가 아직은 못된 것이니까, 정작 부처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서 우리 업장의 종자(種子)를 녹여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잠재의식에는 과거 무수생(無數生)부터 지어내려온 업장이 누덕누덕 끼어 있습니다. 그것을 녹여야 정작, 정말로 부처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마냥 신통(神通)을 합니까, 무엇을 합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인 줄을 느끼기만 하였지, 아직은 업장을 녹여서 정작 참다운 부처가 못되었으니까 우리는 아무런 재주도 못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동안 공부해서,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해가지고서, 업장이 녹아지면 그때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해서 석가모니와 같이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여러 가지 공덕(功德)을 다 부리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참선과 염불로서 정작 우리의 업장을 녹여서 참다운 부처가 되는 것, 그것이 정해탈(定解脫)입니다.

따라서, 도인(道人)이라면 혜해탈(慧解脫)과 정해탈(定解脫)을 겸해야 참다운 도인인 셈이지요.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해탈의 과정 입니다.

淸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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