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공덕(佛性功德)과 그 관조(觀照) I

진아(眞我)의 발견

불교를 학문적으로 믿는 분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중요한 철학적 원리인 윤회설(輪廻說)을 자칫 부인하는 분도 있습니다. 윤회란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은 금생(今生)뿐만 아니라 여러 갈래로 뱅뱅 돈다는 말씀입니다.

윤회는 주로 육도윤회(六途輪廻)라, 우리 중생이 자기 업장(業障) 따라서 여섯 갈래로 도는 것을 말합니다. 제일 밑에가 지옥(地獄)이고, 그 다음은 축생(畜生), 아귀(餓鬼),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이것이 육도(六途)입니다.

따라서, 육도를 벗어난 것이 이제 성자의 경지가 되겠습니다마는, 우리 중생은 육도에서 업장따라 올라가고 내려가고 부침(浮沈)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불교 철학자 가운데도 육도윤회를 그냥 권선징악(勸善懲惡)으로, 우리 중생에게 악(惡)을 피하고 선(善)을 행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또한 하나의 상징적(象徵的)이라고 설(說)하는 분도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 신도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더 긴가민가 하여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으십니다마는, 이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같이 분명히 있듯이 지옥도 분명히 있고, 아귀도 있고, 축생도 있고, 아수라도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이나 도인들 말씀을 보다 더 온순하게 수용을 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다보면은, 유연선심(柔軟善心)이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마음이 강강(剛剛)해서 괜시리 자기 고집을 내세울려고 합니다. 그것이 별것도 아니고 허망한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다보면, 그런 고집스러운 마음, 강강한 마음이 누그러져서 녹아지면 그때는 손탄하게 성자의 말씀을 그대로 순응(順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를 순인(順忍)이라 합니다.

아무튼, 우리가 성자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못 믿는 것은 자기가 영리해서가 아니라 그마만치 어두워서 그럽니다. 즉 다시 말하면, 강강하고 거치러운 마음이 있으니까 못 믿는 것입니다.

또는 지금 몇몇 학자님들이 말씀하듯이 “육도 이것은, 지옥, 아귀, 축생 그런 것은 사람의 마음 속에, 인간의 심리에나 있지 실지에는 없다”고 하지만 분명히 육도는 실제로 존재하고 또한 동시에 우리 심리에도 있습니다.

우리 심리에 있는 가사, 남이 미워서 곧 죽이고 싶은 마음, 남을 때리고 싶은 마음, 이런 마음은 벌써 마음이 지옥(地獄)에 가 있고 또한 동시에, 욕심을 내어서 한없는 그런 마음은 역시 마음이 벌써 아귀(餓鬼)에 가 있는 것입니다.

또는, 멍하니 사리(事理)를 분간도 못하고 판단도 못하는 그런 마음은 역시 마음이 벌써 축생계(畜生界)에 가 있습니다.

또는, 싸움을 좋아하고 성을 잘내는 이런 마음은 역시 아수라계(阿修羅界)에 마음이 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조금 나은 마음, 어떤 때는 궂은 마음, 이와 같이 반반 정도의 마음은 사람같은 데에 마음이 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이니까 사람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지요.

또는, 좋은 일만 생각하고 항시 마음을 고요히 갖는 그러한 마음, 잡다한 소란을 피하고 고요한 데를 좋아하고 맑은 것을 좋아하는 이런 마음은 천상(天上)같은 마음입니다.

모든 번뇌를 다 끊어버리고서 영생(永生)을 구하는 마음은 역시 부처같은 그런 성자의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한테는 분명히 다 있습니다.

따라서, 육도 역시 심중육도(心中六道)라, 우리 마음 가운데 지옥, 아귀, 축생 그러한 육도(六道)가 분명히 존재하고, 또한 동시에 그러한 마음자세에 따라서 우리가 실지로 받는 지옥도 있고 축생도 있고 아귀도 있고 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제 말씀드린 것은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는 법문입니다.

내가 없다는 것은 나의 건더기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망령된 나, ‘나’ 라고 고집하는 나, ‘내가 누구고 나는 무엇을 안다 모른다’ 하는 그러한 망령된 나 즉, 망아(妄我)가 없다는 것이지 ‘진짜 나’ 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소극적으로 말할 때는 무아(無我)란 말은 합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말하면 그때는 진아(眞我) 또는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 말합니다.

어제까지 말씀드린 것은 다만, 망령된 나, 거짓된 나가 없다는 것이지 참다운 나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어제까지 밖에 말씀을 안 들으면 그냥 자칫 ‘나는 허망한 것이다’ 는 허망한 생각만 하지, 모든 일체공덕을 갖춘 ‘참다운 나’ 는 미처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참나인 ‘불성(佛性)의 나’ 를 알고자 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淸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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