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의 수행(修行) I

무아(無我)의 이유

금강경에 ‘통달무아법자 진시보살(通達無我法者 眞是菩薩)이라, 무아법에 통달한 사람이 진실로 보살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없다 하는 무아법(無我法)에 통달하여야만 참다운 보살이라는 뜻입니다.

저번에도 말씀했습니다마는, 우리 범부와 성자와의 차이도 역시 내가 있다는 것을 여의는가 미처 못 여의는가에 있습니다. ‘나’ 라는 아상(我相)을 미처 못 여읜다면 범부이고 ‘나’ 라는 아(我)가 멸진(滅盡)되어 버려서, 그 번뇌(煩惱)가 다 끊어져버려서 그야말로 참, 무아(無我)가 되고 대아(大我)가 되어야 비로소 성자인 셈인지요.

또, 정도(正道)와 외도(外道)의 차이도 역시, 정도는 마땅히 그 구경지(究竟地)가 반드시 ‘내가 없다’ 하는 무아를 증득(證得)해야만 정도(正道)의 표준이고, 그에 반해서 외도(外道)는 어디까지나 나를 못 여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떠한 신통자재(神通自在)로 재주를 많이 부린다 하더라도 나를 못 여의는 것은 외도(外道)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공부할 때에 “내가 없다 무아다” 이런 말은 하기는 쉽습니다마는 ‘분명히 내가 존재하는데 어째서 없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참 답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화두(話頭)도 들고 염불(念佛)도 해서 공부를 많이 하면은, 그때는 ‘나’ 라는 것이 그냥 문득 끊어집니다.

하지만, 우리 업장(業障)이 무거우면 좀처럼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런 때는 우선 방편적(方便的)으로 ‘내가 어째서 없는가’ 하는 원인을 좀 캐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데에서, 부처님 교리(敎理)의 참뜻이 있는 것입니다.

한번 듣고서, 그냥 얼른 느껴가지고서 깨달아 버리면은 문제가 안되겠습니다마는, 업장이 가리어버리면 통달보리심(通達菩提心)을 못합니다. 보리심(菩提心)자리, 자성(自性)자리를 미처 못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때에는 우리가 방편으로 그때그때 여러 가지 한계(限界)를 제시(提示)해 가면서 해설(解說)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제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무아(無我)’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진아(眞我)입니다. ‘참나’ 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대아(大我)라, ‘큰 나’ 입니다. 그리고 자기라 하는 범부성(凡夫性)이 소아(小我) 즉 망아(妄我)입니다.

우리 불교에서 나를 말할 때는 보통 3차원으로 말합니다.

그 한 가지가 망아(妄我)입니다. 망아란 우리 중생들이 미처 번뇌를 못끊은 즉 말하자면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에 얽매인 ‘결박된 나’ 요 ‘망령된 나’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망아는 본래 없습니다.

저번에도 말씀했듯이, 망아는 마치 어두컴컴할 때에 새끼 토막을 뱀으로 보는 그런 견해, 사실은 있지 않는데 망상으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났다 또는 그대가 이쁘다 밉다 이런 것은 망아입니다. 사실은 이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어두울 때에 잘못 봐서 새끼 토막을 뱀으로 보는 그와 같은 견해, 이것이 망아입니다.

그러나 또한 전혀 없지가 않습니다. 인연 따라서 이렇게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존재를 가리켜서 가아(假我)라고 합니다. 가아란 잠시간 거짓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가아(假我)의 참다운 본질이 무엇인가? 곧 가아의 본바탕이 이제 무아(無我) 이고, 진아(眞我) 또는 대아(大我)입니다.

우리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망아(妄我)를, 망령된 나, 잘못본 나를 떠나는 동시에 분명히 지금은 있는 가아(假我)의 본질을 찾는 것이요, 이것이 우리가 공부하는 성불(成佛)의 공부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다고 하는가?

이런 문제는 중요한 문제니까, 좀 군더더기 같지마는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공부해보면 아시겠지마는, ‘나’라는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탐심이나 진심이나 치심이나 모두가 ‘나’ 때문에 일어나지 않습니까. ‘나’ 라는 문제만 해결되면 그런 것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번뇌의 모든 것 즉, 근본번뇌, 수번뇌가 다 나를 기준해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내가 없다’ 하는 것을 우리가 명백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성자(聖者)가 못되는 한에는 제아무리 말로는 다 해도, 역시 나를 잘못 떠납니다. 따라서, 무아(無我)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음에 말씀드리는 정도는 척척 외워서, ‘나’ 라는 망상(妄想)이 나올 때는 그냥, 이런 법문으로 대치를 해 버려야 합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고?

‘사람 몸(人身)에 있어서 이를 있다고 집착(執着)함을 인아(人我)라 하고, 또 제법(諸法)에 있어서 이것이 있다고 집착함을 법아(法我)라 합니다’

제법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일체만법(一切萬法)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산이나 내(川)나 또는 무슨 주의(主義)나, 좋다 궂다 하는 것이나, 유정(有情), 무정(無情) 일체 만유(萬有)를 가리켜서 제법(諸法)이라 합니다.

그런데 ‘사람 몸(人身)은 오온(五蘊)의 가화합(假和合)이므로 상일(常一)의 아체(我體)가 없습니다’

오온이라는 것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 몸은 색(色)에 해당하고 사람 마음은 수, 상, 행, 식(受想行識)에 해당합니다. 곧 감수(感受)하는 작용, 또는 상상하는 작용, 또는 의욕 작용, 또는 분별하는 작용입니다. 사람 몸은 이런 오온이 잠시간 가짜로 합해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의 나라는 그런 몸이 없다는 말입니다.

또, ‘일체법(一切法)은 모두가 인연생(因緣生)이므로 상일(常一)의 아성(我性)이 무(無)라’ 합니다.

일체 제법은 모두가 인연생으로서 어떤 법이나 단독으로 이루어진 법은 한가지도 없습니다. 무수한 인연, 인과 연이 합해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도 역시, 항상 하나인 아(我)의 성품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까, 제가 허두(虛頭)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통달무아법자 진시보살(通達無我法者 眞是菩薩)이라, 참다운 도인이나 보살은 내가 없다는 무아법(無我法) 즉, 내 몸도 참다운 것이 아니고 일체 만법도 항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법에 통달하면, 그때는 도인이요 보살입니다. 그만치 이 문제는 중요합니다.

어째서 내 몸이 없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제가 누누히 말씀 했습니다마는 내 몸이라 하는 것은 각 원소(元素)가 잠시간 화합해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지은 업력(業力)을, 업력은 내나야 우리 마음에 붙은 여러 가지 우리 행위(行爲)나 훈습(熏習)된 것이 업력 아닙니까, 이런업력을 핵(核)으로 해가지고 무수한 인연이 모여서 각 원소가 되고 또 이렇게 조직된 세포가 몸이라는 말입니다.

불교말로 하면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즉, 땅기운, 물기운, 불기운, 바람기운이요, 물리학적인 술어로 말하면 산소나 수소, 질소, 탄소같은 원소가 되겠지요. 이런 것이 우리 업(業)이라 하는 에너지를 핵으로 해서 이렇게 모여 구성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구성되어진 몸은 잠시도 상일(常一)의, 이른바 항시 그대로 있는 몸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변화되어 갑니다. 세포라 하는 것은 어느 순간도 신진대사(新陳代謝)를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일초(一秒)전의 자기 몸과, 일초 후의 자기 몸이 똑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단지, 우리 중생이 느끼지 못할 뿐이지 결국은 어떤 것이나 존재하는 것은 순간순간 변질되어 갑니다.

따라서, ‘항상 있는 어느 공간 속에 항상 존재하는 나’ 라는 것은 결국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것을 못 보니까 있다고 고집하는 것 입니다. 내 몸은 그와 같이 지, 수, 화, 풍 사대(四大) 각 원소가 잠시 간 업 따라서 이렇게 이루어져 있지마는, 그것도 역시 항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도 그대로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항상 하나로 있는 내 몸은 없다는 말입니다.

가사, 하나의 꽃이 피었다고 하면, 그 꽃이 하나의 원인 때문에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공기나 수분이나 또는 태양광선이나 거름이나, 그러한 직접 원인과 또 간접으로 하늘의 반짝이는 별이나 여러 가지 천지 우주의 모두가 다, 직접 간접으로 다 포함되어서 하나의 꽃이 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연생(因緣生)이라 할 때에, 말은 쉽습니다마는 인연이란 말은 굉장히 의미 심중(深重)한 말인 것입니다. 인(因)과 연(緣)을 찾다보면 천지우주를 다 알아야만 인연(因緣)을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를 모르면 인연을 모르는 셈입니다. 우리 중생들이나 지금 현대 과학이나 물리학처럼 인연(因緣) 가운데 몇가지 중요한 인연만 추려서 “무엇이 원인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수없는 인연들이 잠시간 화합해서 이제 이런 꽃이 피었고 그것도 역시 순간순간 또 변질되어 갑니다. 항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꽃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흘러가는 물 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고체(固體)인 바위도 역시, 우리 중생이 보면, 고체로서 이와 같이 딱 둥그런 바위가 있다고 생각할려는지 모르지마는 그것은 중생의 제한된 견해인 것이고, 바위를 구성한 각 원소(元素)를 보고 원자(原子)를 본다고 할 때에는 순간순간 변질되어가는 무상(無常)인 것입니다. 항상(恒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중생은 구조적(構造的)인 겉만 보니까 내용을 모릅니다. 내용을 보면 다 그때그때 변화하고 마는데 말입니다. 아무리 내가 없다 해도 말은 쉽지마는 구성적(構成的) 내용을 모르면 집착을 끊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업장이 무거워서 말입니다.

우리는 나(我)라는 것을 이와 같이 아주 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본다고 할 때는 차근차근 나에 대한 집착이 좀 끊어지겠지요.

‘사람 몸에 있어서 이를 있다고 집착함을 인아(人我)라 하고 또는 일체법에 있어서 이것이 있다고 집착함을 법아(法我)라고 하는데, 사람 몸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지수화풍과 우리 마음을 구성한 감수하는 작용 생각하는 작용, 의지작용, 분별하는 작용, 이런 오온(五蘊)이 잠시간 가짜로 화합되어 있으므로 항시 하나인 나의 몸이 없으며, 일체법은 모두가 인연 따라 이루어진 인연생(因緣生)이므로 이것도 역시 항상 하나인 아(我)의 성품이 없다’ 이렇게 아는 것이 불교의 초보인 셈입니다.

‘내가 없다, 내가 비었다’ 하는 것은 불교말로 해서 아공(我空)이라 하고, ‘일체법이 없다. 일체법이 비었다’ 하는 것은 법공(法空)이라 합니다. 아공 법공을 깨달아버려야 도인(道人)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가 원래 비었다고 분명히 깨닫고, 일체법이 원래 비었다고 보아야만 비로소 깨달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조금 더 부연(敷衍) 설명하고 더 강조하기 위해서 도인들은 ‘내가 없다’ 는 말씀을 종종 합니다.

여기, ‘내가 없다’ 하는 굉장히 중요한 법문이 있습니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