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參禪)의 바른 길 III

실상관(實相觀)

그러니까, 지금 여기 남아서 공부하실 분이나, 집에 돌아가셔서 앞으로 참선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공부하실 분이나 염두에 두실 문제는 무엇이고 하면, 실상관(實相觀) 입니다.

곧 우주의 전모(全貌)를 그냥 한꺼번에 관찰하는 법입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 범부(凡夫)의 영역에 있으므로 불성(佛性)을 못 봅니다.

부처님의 참다운 생명도 못 보고 부처님의 지혜도 우리는 모릅니다.

또한 부처님의 지혜란 것은 말이나 문자로 표현도 못하고 생각으로 헤아리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어느 개념이나 어떤 말 몇 마디로 부처님의 실상(實相)을 한꺼번에 몰록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진여(眞如) 또는 도(道), 열반(涅槃), 극락(極樂), 법성(法性) 또는 불성(佛性), 실상(實相), 실재(實在), 자성(自性), 청정심(淸淨心) 등 모두가 다 표현만 다르지 내용이나 뜻은 똑같습니다.

그때그때 부처님께서 중생의 근기 따라서 또는 각 경전 따라서 표현만 달리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진여는 즉, 말이나 또는 문자로 표현하지 못하는 진리의 당체(當體), 진리 그 자리는 리언진여(離言眞如) 라, 말씀을 여읜 진여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떠나버린 진여, 진리 자체를 우리 범부들은 못 봅니다.

마치 물질을 분석해 나가서 궁극에 텅 빈 장(場)이 되어버리면 그때는 어떤 소립자(素粒子)도 없이 텅 비어서 어떠한 전자현미경으로도 못 봅니다.

그러나, 도인들은 텅 비어버린 그 자리를 분명히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로는 다 표현을 못 합니다.

그러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 자리는 부처님 말씀에도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성취한, 아라한도는 번뇌가 다한 성자의 높은 자리 아닙니까, 그러한 성자가 몇 천만년을 두고 부처님 공덕을 말해도 다 말할 수 없다’ 고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개념적으로는 표현을 못합니다.

따라서 진리당체 자리는 리언진여(離言眞如)라, 말씀을 떠난 진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도 역시 부처님의 심심미묘(深甚微妙)한 지혜로써 밝혀놓은 의언진여(依言眞如)라, 말씀에 의지한 진여라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나 도인들은 중생이 불쌍하니까 비록 말씀을 가지고서 말로는 다 표현 못하지마는, 그래도 부처님의 심심미묘한 지혜로서 가장 간명하게 진여의 실상(實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실상관(實相觀)입니다.

실상(實相)을 간단히 표현한 것이 어떤 것인고 하면은, 천태지의(天台智의 538∼597) 선사(禪師)의 식으로 표현한다면 ‘공(空), 가(假), 중 (中), 삼제(三諦)’ 라 합니다.

불교철학 가운데서 제일 체계가 잘 선 것이 천태지의 선사의 천태학입니다.

말이 너무나도 전문적으로 들어갑니다만, 거기에 보면 우리가 수행하는 법 가운데서 가장 높은 법이 마하지관(摩訶止觀)인데, 그 법은 어떤 것인고 하면은, 부처님의 실상, 우리마음 실상을 바로 관찰하는 법으로 공(空), 가(假), 중(中) 삼제(三諦) 입니다.

‘공(空)’ 은 무엇인고 하면, 바로 보면은 우주는 텅 비어있다는 말입니다.

아까 말씀대로, 참구하거나 분석해 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있지 않고 빈 가운데는 현상적으로는 묘유(妙有)로 충만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거짓 가 자 ‘가(假)’ 입니다.

또한 그러한 공(空)만도 아니고 또한 가(假)만도 아닌 것이기 때문에 ‘중도(中道)’ 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변증법(辯證法)인 셈이지요.

공(空)도 아니고, 또는 가(假)도 아니고 중도(中道)란 즉, 말하자면 정(正)도 아니고 반(反)도 아니고 합(合)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실상을 표현했습니다.

조금 더 간추리면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천지우주는 바로 보면 그저 텅 비어서 물질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사실, 물질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나 현대인들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물질은 본래 없습니다.

다만,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하나의 파동(坡動)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물리학도 그러한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그 무엇의 파동, 그것이 물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문제를 보다 더 극명(克明)하게 세밀히 풀이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 물질은 하나의 염파(念波)에 불과하다 곧, 우리 생각의 파동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어렵게 말하면 ‘천지우주는 모두가 다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으로 이루어졌다’ 는 말입니다.

산(山)이나 내(川)나 천지우주가 사람의 마음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면 처음에는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습니다.

우리 중생의 생각하는 힘인 업력(業力)이 쌓이고 모여서 전자(電子)가 되고 또는 양핵(陽核)이 되어서 천지우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말씀을 다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은 물리, 화학적으로 증명한 것은 아니지요.

아무튼, 실상경계는 아까 말씀드린 진공묘유(眞空妙有)라, 원래 물질은 텅 비어서 없는 진공(眞空)이고, 다만 텅 비어서 없는 것이 아니나 묘유(妙有)라, 묘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추유(추有) 즉, 거치러운것 밖에는 못 봅니다.

우리 중생은 더러운 것 밖에는 못 봅니다. 참다운 묘유(妙有)는 못 봅니다.

우주의 실상은 진공인 동시에 바로 묘유입니다.

공(空)인 동시에 가(假)요,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기 때문에 중도(中道)입니다.

법신(法身)만도 아니고 보신(報身)만도 아니기 때문에 그야말로 참, 아미타불(阿彌陀佛)인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수행법이 있으나 그와 같은 실상묘법(實相妙法)으로, 비록 지금 내가 못 봤지만 ‘내 몸뚱이나 내 마음이나 천지우주 생명이나 모두가 다, 진공묘유(眞空妙有)구나’ 반야심경식으로 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구나’ 조금 더 변증법적으로 말하면 ‘공, 가, 중(空假中)이구나’ 여기다가 생명을 부여하면 그때는 ‘법신, 보신, 화신 아미타불이구나’ 이렇게 납득하는 것이 우주만유의 본질, 실상을 알고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그 자리를 딱 짚어야 합니다.

그래가지고 참선도 하고 염불을 해야 공부가 가속도로 나아가집니다.

보적경(寶積經)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백천만겁 구습결업(百千萬劫 久習結業) 이실상관 즉개소멸(以實相觀 卽皆消滅)이라’ 우리 중생은 누구나가 다 백천만겁 동안 익히고 쌓인 그런 업장이 있습니다.

미워하고 또는 사랑하고 또는 분별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업장들이 실상을 관찰하는 것으로써 즉 시에 다 소멸된다는 말입니다.

앞서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가 반야심경식으로 해서 공(空)을 관찰해도 무방하고, 화두(話頭)를 참구해서 의심해도 무방합니다.

또는 그냥 부처님의 이름만 외워도 무방합니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해도 무방합니다. 다 성불하는 법(法)입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길인 참선(參禪)식으로 하는 법은 우리 마음을 바로 실상(實相)에다 안주(安住)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선(禪)이 됩니다.

어느 특정적이거나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본체(本體)에 다가 마음을 딱 두어야 참선이란 말입니다.

비록 화두를 들고, 또는 공을 관한다 하더라도, 공이나 화두 그것이 실상을 대변하면 좋지마는 그냥 공에 치우치고 또는 상대적인 의심에 치우쳐 그것만이 다라고 하면 그때는 참선이 못됩니다.

淸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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