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쟁사상(和爭思想) V

흔히 우리는 ‘마음을 비웠다’는 말을 쉽게 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을 비우고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대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원효는 한쪽으로만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보신(報身)에 대해 상주라는 집착과 무상이라는 집착이 있는데, 두 분의 주장 중 어떤 것이 맞고 어떤 것이 틀리는가? 어떤 분은 말하기를 다 맞기도 하고 다 틀리기도 하다. 그 이유는 만약 한쪽만 결정적으로 집착하면 다 과실이 있고(若決定執一邊 皆有過失), 장애가 없이 말한다면 다 도리가 있는 것이다(如其無障碍說 俱有道理).

편협한 생각에 얽매여 일방적으로 한 면만을 고집하거나 한 가지 입장만을 절대화하고 독단화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경우,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원효의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에는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조금 들은 바 좁은 견해만을 내세워, 그 견해에 동조하면 좋다고 하고, 그 견해에 반대하면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마치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것과 같아서, 그 구멍으로 하늘을 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를 적은 것을 믿어 많은 것을 비방하는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편협한 사고는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싸움밖에 되지 않습니다. 고정된 자기 견해에만 열광적으로 집착함으로 다른 견해들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습니다. 특히 종교인들 중에 그런 사람이 더욱 많습니다. 특정 신념과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만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것은 다 틀렸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떤 이데올로기를 가졌는가 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행복 하냐 그렇지 않으냐 아닙니까. 기독교면 어떻고 불교면 어떻습니까. 신념의 노예,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철 타고 가다보면 간혹 막 협박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뭐 안 믿으면 큰일 난다고. 그럴 때면 ‘당신만 가만히 있으면 다 괜찮을 거요.’란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원효가 ‘자신의 견해에 반대하면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異其見者 咸是脫失)’고 지적한 것도 이렇기 때문입니다.

화쟁이라는 것은 다양성의 인정에서 출발합니다. 세상의 이치는 오직 한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문은 많고, 그 문으로 향한 길도 많습니다. 그래서 원효는 『기신론소(起信論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법문이 한량없어 오직 한 길만이 아니다(法門無量 非唯一途).
이 때문에 곳을 따라 시설해서 모두 도리가 있다(故隨所施設 皆有道理).

세상의 이치는 하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로 다른 것도 아닙니다. 불일(不一)이기에 모든 방면에 통하고, 불이(不異)이기에 어떤 길도 통합니다. 서울로 오는데 만약 남대문으로만 오라면 되겠습니까? 남대문으로 올 수도 있고 동대문으로 들어와도 되지요. 또 오는 방법도 기차타고 오는 방법도 있고 비행기 타고 오는 방법도 있고 자전거를 타고와도 됩니다. 남대문으로만 자전거 타고 들어오라면 좁아서 들어오지도 못합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지요. 그런데 이렇게 상식적인 것 같아도 어느 면에 있어서 우리 사회는 지극히 비상식적입니다.

예전에 변선환 목사님이라고 신학을 전공하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타종교에도 약간의 구원은 있는 것 같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 때문에 난리가 났었습니다. 오로지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게 무슨 해괴한 말이냐 하면서 교수직 박탈당하고 교단에서 축출된 채로 얼마 후 돌아가셨습니다.

여러 길이 있는데 한 가지 길만 옳고 다른 길은 전혀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길은 하나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법에 이르는 길은 한량이 없습니다. 한 길만 있는 게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원효는 또 『열반종요』에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가 아닌 까닭에 모든 부문에 해당하고(由非一故 能當諸門),
다른 것이 아닌 때문에 모든 부문이 한 맛이다(由非異故 諸門一味).

인생의 길이 어찌 하나 뿐이겠습니까. 어찌 어느 한 길만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어느 길도 행복의 동산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도, 어떤 인생의 길을 걸어도 그것은 한 맛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문으로 오건 서울에 올라와 살면 모두가 서울시민이지 고향이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다음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에 나오는 원효의 말을 음미해보록 하지요.

부분적[別觀]으로 도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부처님은 많은 법문을 하여 그 들어가는 문은 많게 되었지만, 그 이치로 볼 때는 둘이 없는 것이다. 비유로 말하면, 저 한 성에 네 개의 문이 있어서 들어가는 데는 비록 한 문으로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도 일단 성 안에 들어가면, 둘이 없음이니, 이 뜻도 또한 이와 같다. 만약 차별문으로 말하자면, 이 문이 저 문이 아니고, 저 문이 또한 이 문이 아니나, 저 전체적인 문[通門]은 부분적인 문[別門]을 다 가지고 있다. 비록 그물눈은 하나하나 달라 차별이 있지만, 그물은 그물눈들을 다 가지고 있으니, 그물눈이 바로 그물이라는 뜻이다.

원효는 『본업경소』에서 ‘문 아닌 것이 없기에 일마다 모두 현묘(玄妙)함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도(道) 아닌 것이 없기에 곳곳이 모두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다양성의 인정, 그것은 본래 불교의 기본 입장인 동시에 원효 화쟁 논리의 한 전제이기도 합니다. 비좁고 옹색한 가슴을 열면 창창한 하늘이 열립니다. 원효는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에서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도는 넓고 탕탕하여 걸림이 없고 범주가 없다. 영원히 의지하는 바가 없기에 타당하지 않음이 없다. 이 때문에 일체의 다른 교의가 모두 다 불교의 뜻이요, 백가의 설이 옳지 않음이 없으며, 팔만법문이 모두 이치에 들어간다.

이처럼 원효가 “일체의 타의(他義)가 모두 다 불의(佛義)”라고 가슴을 열었을 때, 또 “외도의 갖가지 다른 선도 모두 일승”이라고 인정할 때, 도교도 유교도 이미 그에게는 타의가 아니었습니다.

마땅히 알라. 제불의 법문은 하나가 아니기에(當知諸佛法門非一),
그 교설을 따라서 장애도 없고, 착란도 없다(隨其所說而無障碍而不錯亂).

불교는 진리에 대한 독단과 종교 자체의 절대화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붓다는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뗏목의 비유를 들고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뗏목의 비유로써, 교법을 배워 그 뜻을 안 뒤에는 버려야 할 것이지 결코 거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였다. 너희들은 이 뗏목처럼 내가 말한 교법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법(法) 아닌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이처럼 불교에서는 교법에 집착하는 것까지도 미련 없이 떠나라고 가르칩니다. 이 교훈에 의하면, 종교가 ‘절대 신념체계’라는 견해까지도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이 용어는 동양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지극히 서구적인 표현입니다.

뗏목은 타고 건너가면 그냥 버려야 될 것이지요. 종교는 결국은 뗏목이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일체의 타의가 모두 불의(佛意)라고 눈 크게 뜰 때, 도교도 유교도 그에겐 이미 타의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김상현/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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