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금강삼매경론』의 한 구절 살펴보고 원효의 화쟁론에 대해 계속 설명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의 두 구는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들어 평등의 뜻을 나타낸 것이요(前之二句 融俗爲眞 顯平等義)
아래의 두 구는 진제를 녹여 속제로 만들어서 차별의 문을 나타낸다.(下之二句 融眞爲俗 顯差別門)
이것을 총체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진실되다 속되다라고 말하는 것은 둘이 아니고 그렇다고 하나도 아니다. 그러므로 둘이 아니기 때문에 곧 그것은 일심이고 하나를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본체를 들어 둘로 삼아 이와 같이 이름해서 일심이문이라고 한다.(摠而言之 眞俗無二而不守一 由無二故 卽是一心 不守一故 擧體爲二 如是名爲一心二門)
불교를 처음 듣는 분들은 이 말이 상당히 어려울 겁니다. 사실 불교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들도 헤매는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원효의 논리는 양자택일이나 변증법적인 통일의 논리와는 분명 다릅니다. 우리는 흔히 남쪽이냐 북쪽이냐, 흑이냐 백이냐, 찬성하느냐 찬성하지 않느냐를 캐묻습니다만 A가 아니라고 반드시 B인 것은 아닙니다. A가 아니면서 동시에 B도 아닐 수 있는 것이고 A면서 B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양자택일로 가지 않습니다. 또 변증법은 상반된 두 가지 관계를 동시에 보기보다는 정이 있고 반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양자를 모순이나 양립할 수 없다고 간주하고 합을 도출해 냅니다만 불교에서는 양자가 함께 존립할 수도 있다고 보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럼 원효가 자주 사용했던 용어들, 즉 둘을 융합하되 하나는 아니라는 ‘융이이불일(融二而不一)’ 두 극단을 떠나되 가운데도 아니라는 ‘이변이비중(離邊而非中)’ 돌쩌귀에 들어맞듯 묘하게 계합한다는 ‘묘계환중(妙契環中)’ 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둘이나 변(邊)이라고 하는 것은 두 극단입니다.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있다거나 없다거나 같다거나 다른 이러한 극단을 변이라고 합니다. 이 두 극단을 떠나는 것 이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그럼 중도는 100센티의 중간인 50센티를 말하는 것이냐 이런 게 아닙니다. 또 앞장서면 사진도 찍히고 회유, 협박을 당하고 또 너무 뒤에 있으며 손가락질 받으니까 적당히 중간 쯤 회색분자로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나서는 게 옳을 때 나서는 것이 중도고 따지는 게 옳을 때 따지는 것이 중도입니다. 여기서 중은 가운데 중이 아니고 적중의 중입니다. 딱 들어맞는 것 그것이 바로 적중입니다. 그런데 적중이라는 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지구에서 화성에 우주선을 쏘아 올리려고 한다면 지구도 움직이고 우주선도 움직이고 화성도 움직이는 종합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고도의 분석과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중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데 거기에 딱 들어맞는 것, 마치 게임기에서 돈이 좌르륵 쏟아지는 순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이런 것을 장자에서는 환중(環中)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환이라고 하면 고리지요. 그 고리에 딱 들어맞듯 또 돌쩌귀가 딱 들어맞는 것처럼 묘하게 계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변이비중(離邊而非中)’이라, 그 극단을 떠났다고 해도 중간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끝일 수도 있고, 중간일 수도 있고, 공중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겁니다.
원효는 있다거나 없다거나(有無), 긍정한다거나 부정한다거나(立破), 전체적으로 열어서 말을 하거나 통합적으로 말하거나(開合), 이론적이거나 사실적이거나(理事), 하나거나 많거나(一多), 같거나 다르거나(同異) 상반된 두 개념을 대립이나 모순으로 파악하기보다 하나도 아니되 둘도 아닌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논리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독립된 실체가 없습니다. 노자는 이에 대한 설명이 없었지만 불교에서는 어떤 고정된 실체도 없기 때문에, 모두가 움직이기 때문에, 모두가 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봅니다. 나도 변하고, 사물도 변하고, 날씨도 변하고 다 변한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기본적으로 설정하고 있는 게 모든 것은 전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 즉 수없이 많은 것들의 인연으로 얽혀서 되어있고, 거기에 실체란 없으며 그저 무상하고 가변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곧 공(空)이라고도 합니다. 무아(無我)와 무상이 곧 공입니다.
그런데 이 공에 집착해 공을 허무나 실체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악취공(惡取空)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공병(空病)을 다스리기 위해 공(空)도 공(空)이라고 합니다. 즉 공공(空空)입니다. 이 공공에 다시 집착하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공공 또한 공이라고 부정합니다. 이를 삼공(空相亦空, 空空亦空, 所空亦空)이라고 합니다. 원효도 삼공에 대해서 논의했습니다. 그는 또 『열반경종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보신불의 공덕은 모습도 벗어나고 자성에서도 벗어나 있다(報佛功德 離相離性).
자성에서 벗어났기에 상주하는 속성에서 벗어나 지극히 역동적이다(以離性故 離常住性).
지극히 역동적이라 하지 못할 것이 없으니, 그래서 상주함이 없다(最極暄動 無所不爲 故說無常).
그리하여 양면긍정이나 양변부정까지를 포함하는 사구(四句)의 논리로 화쟁을 시도합니다. 같고 다름(同異)에 관한 원효의 설명을 『금강삼매경론』에서 살펴보지요. 다음의 이 구절은 여러분들에게 대단히 애매하게 느껴질 겁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유가 대단히 단순하기 때문이지 원효에게 문제가 있어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같다면 무엇을 가지고 같다고 말하는 것인가, 다르다면 무엇을 가지고 다르다고 말하는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실 결과적으로 같다,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양 극인데 그게 서로 동전의 양면입니다.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같은 것을 설명할 수 있고,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문을 보겠습니다.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같으면서 다른 것이고(不能同者 卽同而異),
다르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곧 다르면서도 같은 것이다(不能異者 卽異而同也).
同이란 다른 것에서 같은 것을 알아내는 것이요(同者 辨同於異),
異란 같은 것에서 다른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異者 明異於同).
같은 것에서 다른 것을 밝힌다는 것은(明異於同者),
같은 것을 쪼개서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非分同爲異也).
다른 것에서 같은 것을 알아낸다는 것은(辨同於異者),
다른 것들을 녹여서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非銷異爲同也).
실로(良由)
同이란 다른 것들을 녹여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同非銷異故),
그것이 (언제나)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不可說是同),
異란 같은 것을 쪼개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異非分同故),
그것들이 (언제나)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不可說是異).
다만(但以)
다르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같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요(不可說異故 可得說是同),
같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不可說同故 可得說是異耳).
말한다든가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둘이 아니고, 별개도 아니다(說與不說 無二無別).
원효에 의하면, 같은 것(同)과 다른 것(異)도 서로 바라보고(相望) 있고 서로 비추고(相照) 있는 관계일 뿐 평행선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설명이 되는 거죠. 이게 화엄철학의 기본 아닙니까. 아프리카에 가서 내가 너무 피곤해 앉아서 지나가는 흑인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그 아프리카 사람들은 지나가며 날 구경하고 있습니다. 화엄철학에서는 샹들리에 구슬들이 수천 개 있는데 그 구슬들 하나하나는 모든 것을 받고 반사하고 서로 얽히고설키어 있듯 모든 것이 그렇다고 말합니다.
“같다(同)고 하는 것도 다른 것(異)을 녹여서 다 똑같이 만든 것이 아니다(辨同於異者 非銷異爲同也).”
원효의 이 말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다 몰아낸 뒤에 같은 견해로 획일화하는 것이 화쟁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가끔 획일화하려고 도모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걸 똑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평등이란 학의 다리를 끊어서 오리 다리에 잇는 것도, 산을 무너뜨려 골짜기를 메우는 것도 아니다.”
『직지심체요절』을 쓴 고려 백운(白雲)화상의 이 말을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면 많은 시비를 종식시키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효의 화쟁논리가 더욱 가치를 발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요.
김상현/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