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원효의 화쟁(和諍)사상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화쟁에 대한 이해는 참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화쟁은 서로 다치지 않고 화해롭게 지낸다는 것인데 이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효의 화쟁사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관심을 가져왔지만 정작 원효의 화쟁을 규명해내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도, 또 어느 정도 규명해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듯 보이는 것도 화쟁이 언어의 문제가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사람들은 자주 다투고, 세상은 평온한 날이 적습니다. 나는 옳은데 당신은 그르다는 시비가 자주 일어나고, 입씨름이 격해지면 주먹이 오가며, 주먹이 대포로 바뀌면 전쟁입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지만, 자기의 고집을 꺾기란 참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백가(百家)의 서로 다른 논쟁을 어떻게 조화하고 화해시킬 수 있는지는 사람들의 오랜 숙제였습니다. 7세기 삼국통일 전쟁의 와중에 살았던 원효는 화쟁의 방법을 모색해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이라는 명저를 남겼습니다.
원효가 살았던 이 7세기는 우리역사상 가장 험난한 전쟁의 완전한 소용돌이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쟁이 일어나고 낙엽처럼 목숨이 떨어지던 불운한 시대였습니다. 삼국 자체가 소용돌이였고 오늘날 생각하는 민족의식이고 뭐고 그런 거는 찾아볼 수 없는 이전투구의 장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나라와 일본까지 이 싸움에 개입하고 있을 정도로 동아시아 전체가 혼란의 양상을 보이고 있을 때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원효가 이러한 7세기 험난한 시대를 살면서 이러한 화쟁의 논리를 전개하고 그 방법을 추구했다는 점입니다.
원효에게 있어서 화쟁은 세계와 인생의 본래 모습을 의미하는 당위이면서 동시에 그의 학문 방법론이자 실천행의 목표이기도 했습니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주목받아 왔습니다. 9세기 초의 기록인 ‘서당화상비문(誓幢和上碑文)’에서는 『십문화쟁론』을 원효의 대표적인 저술로 인식하면서 화쟁의 의미를 부각시켰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훌륭하다는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 훗날 화쟁국사(和諍國師)에 추봉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칭송만 했던 것은 아니고 당시에도 반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원효의 이 화쟁방법이나 이론에 대해 비판했던 사람도 있었고 학문적인 토론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면 그게 뭐고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세한 글은 아니고 단 몇 줄만 남아있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그럼에도 그 시대 대부분은 지성인들은 그 책을 훌륭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화쟁사상은 원효사상의 핵심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원효가 “백가의 다른 견해와 쟁론의 극단을 조화함으로써 일대의 지극히 공정한 논법을 이루었다(和百家異諍之端 得一代至公之論)”고 찬양했습니다. 지난 번 말씀드렸던 것처럼 대각국사의 이 평가는 주목할 만합니다. 대각국사는 그 이전에 이루어진 모든 학문적 성과를 연구사적으로 검토한 토대 위에서 이런 발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천단(?∼1259)은 ‘신라시대에 원효공이 우뚝 나타나서 백가의 이쟁(異諍)을 화합하고, 이문(二門)을 합하여 돌아감을 함께 했다’고 했습니다.
의천과 하천단은 원효를 ‘화백가이쟁(和百家異諍)’한 인물로 평했던 것입니다. 특히 의천은 ‘원효와 의상은 동방의 성인이다. 그러니 이 분들에게 국사의 호를 올리는 게 좋겠다’고 건의합니다. 이에 따라 의천의 형인 숙종은 6년(1101) 8월 계사에 조서를 내려, 원효에게 화쟁국사라는 시호를 추증하기도 했는데, 이는 고려조정에서 원효사상의 특징을 화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구체적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김부식(1075~1151)은 ‘화쟁국사영찬(和諍國師影贊)’을 지었는데, 이로써 고려시대에 화쟁국사의 진영이 그려지고 시호가 통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명종(1171~1197) 때에는 분황사에 화쟁국사비가 건립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비가 다 깨져 없어지고 비의 받침돌만 남아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도 분황사에 와서 이를 확인하고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새겨놓았습니다. 예전에 동국대에서 발굴하다 찾아낸 조그마한 비 한 조각만 오늘날 남아있을 뿐이지만 다행히도 탁본은 있습니다.
원효는 『십문화쟁론』 2권을 저술했습니다. 원효의 여러 저술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이 책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당나라와 일본에 유포되었고, 당나라에 왔던 진나문도(陳那門徒)에 의해서 멀리 천축에까지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고려초기의 균여는 『십문화쟁론』을 몇 차례 인용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12세기 후반에 활동한 곽심(廓心)의 『원종문류집해(圓宗文類集解)』에도 『십문화쟁론』에 대한 언급이 보입니다.
특히 일본에서도 원효의 이 책은 오랜 세월 유통되었던 것 같습니다. 진해(珍海, 1091~1152) 및 응연(凝然, 1240~1321)도 『십문화쟁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14세기 전반까지도 일본에 원효의 『십문화쟁론』이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해인사의 사간장경(寺刊藏經) 중에 『십문화쟁론』 상권의 제9, 제10, 제15, 제16, 제30, 제31장의 목판이 남아오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제30장과 제31장은 마멸이 매우 심한 편입니다. 대개 고려시대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겨우 몇 판만 전합니다. 서당화상비문(誓幢和上碑文)에서도 『십문화쟁론』을 강조해서 서술했습니다. 대개 2000자 정도 되는 비문을 썼는데 『십문화쟁론』에 대해 200자 정도 그러니까 10분의 1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9세기 초에도 이미 『십문화쟁론』에 대한 평가가 대단히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십문화쟁론』은 여래가 세상에 계실 때에는 원음(圓音)에 의지하였으나,…(마멸)… 비처럼 흩뿌리고, 부질없는 공론(空論)이 구름처럼 분분하였다. 혹자는 나는 옳은데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설은 그럴듯하나 타인의 설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면서, 큰 강물과도 같이 많은 지류를 이루었다.…(마멸)…산을 버리고 골짜기로 돌아간 것과 같고, 유(有)를 싫어하고 공(空)을 좋아함은 나무를 버리고 큰 숲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다. 비유컨데, 청색과 쪽풀은 본체가 같고 얼음과 물은 근원이 같은데, 거울은 모든 형상을 받아들이고, 물이 수천 갈래로 나누어 지는 것과 같다.…(마멸)…융통하여 서술하고 그 이름을 『십문화쟁론』이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이를 칭찬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모두 좋다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 훌륭한 논술이라고 찬양했다는 『십문화쟁론』, 이 명저도 세월의 허망한 바람에 흩어지고 지금은 겨우 3판 만이 해인사에 전해오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역시 어떻게 화쟁을 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종교와 문화를 떠나 다툼을 화해시키고자 했던 것은 한결 같았지만 그 방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십문화쟁론』이 현재 전해지지 않아 그 전체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여기저기 남아있는 원효의 20여 종의 저술을 잘 읽어보면 화쟁의 방법을 이용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구절들이 중간 중간에 보입니다.
이 점에 착안한 연구는 박종홍 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습니다. 그는 화쟁의 논리라는 주제를 설정하고 전체적으로 열어서 보고 통합적으로 보는 ‘개합(開合)’과 총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보는 ‘종요(宗要)’, 긍정과 부정의 ‘입파(立破)’, 주거나 빼앗는 ‘여탈(與奪)’, 무엇이 같고 다른가 하는 ‘동이(同異)’, 있고 없음의 ‘유무(有無)’, 두 극단을 떠나 떠나되 가운데도 아니라는 ‘이변이비중(離邊而非中)’, 한 가지 맛이라는 ‘일미(一味)’와 언어를 뛰어 넘는 ‘절언(絶言)’ 등에 관해 논의했습니다. 얼마 전 정년퇴임을 하신 김형효 선생 또한 원효의 화쟁 논리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원효 철학의 의의는 단적으로 상반된 두 세계를 묘합(妙合)하는데 있음이 틀림없고, 이런 사유의 논리를 스스로 ‘융이이불일(融二而不一)’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즉 원효의 화쟁정신이란 두 가지를 융합하나 하나로 획일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효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토 시게끼라는 일본사람은 원효의 화쟁 논리가 ‘무이이불수일(無二而不守一)’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즉 둘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만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갈 부분은 아니지만 일단 원효가 이런 단어를 즐겨 썼고 관심을 가졌다는 것만은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김상현/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