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생애(生涯) I

원효는 삼국간의 전쟁과 통일이 있었던 격변의 7세기에 살았습니다.

경산에서 태어나 15세경에 출가해 수행과 교학에 매진하는 젊은 시절을 보냈고, 40세 전후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무렵 그는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薛聰)을 얻고 환속하여 소승거사(小性居士)로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가무(歌舞)로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누비며 대중을 교화했고, 밤을 지새우며 교학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686년(신문왕 6)에 70생애를 혈사(穴寺)에서 마감했습니다.

원효는 해방자였고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온갖 사슬과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려야 함을 이론적으로 밝혔을 뿐 아니라 온 몸으로 이를 구현했던 분입니다. 원효는 또 큰 학승이었습니다. 천부적 재능과 불같은 열정과 냉철한 비판안과 정확한 논리, 그리고 뛰어난 문장력을 갖춘 위대한 학승이었고, 100여부 240여권의 저서를 남긴 세계적인 대저술가였던 것입니다. 그는 경·율·론 삼장(三藏)과 대·소승 경전에 두루 통했던 웅대한 안목의 학승이었습니다. 불교 사상을 새롭게 종합하고 체계화시켜 독창적인 사상을 천명해서 고금(古今)의 오류를 바로 잡았습니다. 원효의 교학은 한국불교의 토대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21세기의 문턱에 서 있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7세기에 살았던 원효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원효의 사상에는 시대와 민족과 종교의 벽을 뛰어넘는 보편성이 있습니다. 그의 사상은 동아시아 전체에 통하는 보편사상이었고, 오늘의 우리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현실성과 참신성이 있습니다. 그가 파헤쳐 보여주고 있는 마음의 세계와 화쟁의 논리, 그리고 자유인의 몸짓 등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로 다가섭니다.

널리 법계를 위하여 하나의 등불 밝히노니(普爲法界燃一燈)
이 등불 전하여 사방을 두루 비추소서(願用傳燈周十方)

어둡고 긴 밤을 밝히는 하나의 등불, 원효는 스스로 그 등불이기를 염원했습니다. 7세기 신라에서 원효가 밝힌 등불과 인생의 불꽃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지로 퍼지며 수많은 가슴에 불을 붙였고, 지금도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무진등(無盡燈)입니다. 원효는 아직 채굴이 다 끝나지 않은 광맥입니다.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정리, 현존 저서의 충실한 역주, 현대의 언어로 다시 읽고 쓰는 해석학적인 접근 등은 우리들에게 남겨진 과제입니다. 우리가 원효를 배우고 그를 세계에 두루 알리는 일은 더욱 중요한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세계문화사에 우뚝 솟은 봉우리인 원효, 그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자존심이고 긍지며 자랑입니다. 그리고 젊은 구도자가 도전해 볼만한 높은 산입니다.

원효의 성은 설 씨입니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 아버지는 담내였습니다. 압량군(지금의 경산)의 불등을촌에 살았던 아버지는 11위인 내마(奈麻)였습니다. 어머니는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했으며, 출산 때에는 오색구름이 주위를 덮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효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담내의 집은 밤나무골 서남쪽에 있었다. 어머니가 만삭이 되어 마침 이 골짜기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히 분만하고 창황 중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우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 놓고 그 가운데를 자리로 하였는데, 그 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고 했다.

이처럼 원효는 밤나무 밑에서 태어났는데, 그 때가 진평왕 39년(617)이었습니다. 담내는 아이의 이름을 서당(誓幢)이라고 지었습니다. 압량군의 불등을촌 밤나무 아래에서 태어난 서당, 그는 오색구름을 타고 온 별이었고, 어둠을 밝힐 불덩어리였으며, 희망찬 새벽이었습니다. 불등을촌은, 원효를 배출한 인연으로 해서, 불지촌(佛地村)으로 불렸고 그 밤나무는 사라수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원효의 탄생을 붓다의 출현에 비견하여 붙인 이름들이라고 볼 수 있죠.

아쉽게도 원효의 젊은 날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송고승전』의 기록에 의해서, 15세경에 출가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청소년 시절을 진평왕대(579~631)의 말기에 보냈습니다.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이 무렵, 신라의 진취적인 젊은이들이 자기를 닦아 내일을 준비하려 할 때, 대개는 풍류도(風流道)나 불교로 나아가곤 했는데, 큰 불덩이 하나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을 원효, 그의 가슴 태우던 구도의 불길은 그를 불문(佛門)으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는 젊은 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수행에 몰두하던 구도자의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좋은 음식으로 길러도 이 몸은 무너질 것이고, 부드러운 옷으로 보호해도 목숨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수행이 없는 빈 몸은 길러도 이익이 없고, 덧없는 목숨은 아껴봐도 보전하지 못한다. …백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라고 닦지 않고 방종하랴.

몸뚱이를 살찌우면서 세월을 허송할 일이 아니라, 마음을 발해 수행에 부지런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이 글을 통해서 정진으로 보냈을 젊은 날의 원효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의 총명은 흔히 생이지지(生而知之)로 표현되곤 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알았기에 그는 스승을 따라서 배우지 않았다고도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의 천재적 총명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송고승전』에서는 “스승을 따라 배우되 일정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낭지(朗智), 보덕(普德), 혜공(惠空) 등으로부터 배운 적이 있습니다. 원효에게는 참으로 좋은 벗이 있었는데, 의상은 그의 도반이었습니다. 의상은 원효에 비해 8년이나 후배고, 출신도 성격도 수행 방법도 전공 분야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으로 친했던 진리의 벗이었습니다. 650년(진덕여왕 4년), 34세의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의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들은 멀리 요동에 이르렀는데, 변방의 순라군에게 정탐자로 오해되어 수십일 동안을 갇혀 있다가 간신히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현장법사가 주도하고 있던 장안의 새로운 불교학풍을 접하고자 떠났던 구도의 먼 길, 그 길에서 원효는 뜻하지 않은 시련과 좌절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그 후 10년 세월, 원효에 관한 기록은 또 침묵하고 있습니다. 30대 후반으로부터 40대 전반에 이르는 10년간이 그에게 황금같이 소중한 시절이었을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진덕여왕과 무열왕의 치세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참혹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풍진 세월이었습니다. 이 시절에도 원효는 원(願)이라는 갑옷을 입고 수행과 학문에 부지런히 정진했던 것입니다.

김상현/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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