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칭명(稱名)과 염불선(念佛禪)

요즘에는 염불수행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행법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심지어는 나반존자, 화엄성중, 산왕대신을 부르는 것도 염불에 포함하여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통불교의 포용력이 아니라 염불의 근본 뜻을 모른 채 세속적 욕망에 부합하여 불교의 근본과 나아갈 방향을 흐리게 하는 저급한 방편불교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부르는 자와 그것을 바로 가르치지 못하는 지도자의 어리석음이 더불어 기복불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떤 명호가 아니라 부르는 뜻에 있습니다.

원효는 이 점에 대하여 칭명과 염불의 뜻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칭명은 모두 ‘자비광명에 의지함’이요, 믿음을 성취하는 방편이며, 안심법(安心法)입니다. 그리고 염불은 본원력(本願力)에 의지하되 부처의 경계를 생각하는, 즉 타력에 힘입어 ‘스스로 닦음’으로 깨달음을 성취하는 염불선입니다.

<관무량수경>에서도 칭명(稱名)과 염불(念佛)의 뜻을 이와 같이 밝혔습니다.

<하품하생>에서 “하품하생의 사람은 착하지 않은 업을 짓고, 오역죄와 십악을 모두 갖추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악업에 의해 마땅히 악도에 떨어져 여러 겁의 고통을 끝없이 받겠지만, 목숨이 다하는 때에 이르러, 선지식이 갖가지 안심과 위로를 베풀고 묘법을 설하여 ‘염불하라’ 함에도 고통의 핍박으로 인해 부처님을 생각하지 못하니, 착한 벗이 ‘그대가 만약 염불이 되지 않는다면 마땅히 무량수불을 부르라’ 하고 말했을 때, 이렇게 지극한 마음으로 소리를 끊이지 않고 십념(十念)을 구족하여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니,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기 때문에 생각 생각에 가운데 80억겁 생사의 죄를 소멸하는 중생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번뇌가 깊고 죄업이 무겁기 때문에 정토의 경계나 부처님의 상호를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임종시라도 참회와 믿음의 뜻을 실어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부르면 50억겁, 80억겁의 생사의 죄가 소멸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깊이 새겨야 할 점이 있습니다. 칭명은 믿음을 성취하는 방편이라고 말하지만 그 믿음은 삶에서 야기되는 특정한 고통 혹은 욕망의 해결이 아니라, 생사해탈이라는 인생 전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곧 부처님이 변화를 성취하여 얻은 성소작지에 대한 믿음이요,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비록 삶이 괴롭지만 그것은 생사윤회라는 사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므로 수행의 목적도 생사해탈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칭명염불은 명호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믿음만 가지고 부르면 되지 명호를 의심하거나, 소리를 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칭명은 육근 가운데 둘 이상을 동시에 작용할 수 없는 범부를 위해 열어 보이신 대자비방편입니다. 진실한 믿음으로 명호를 부르고 믿음이 성취되어야 염불선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칭명으로 성취하는 ‘믿음의 극치’가 염불삼매입니다.
양산/정토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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